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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노닐던 화청지엔 해당화 꽃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琢言 - 내 블로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5.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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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노닐던 화청지엔 해당화 꽃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당나라 때 수도였던 중국 시안(옛 이름 장안) 동북쪽에 있는 화청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무대였다. 방금 목욕을 끝내고 나서는 고혹적인 모습의 양귀비 동상이다. [중앙포토]

요시다 미치에 수필가, 번역가
요시마 미치에 ‘고독한 여행자'
실크로드의 동쪽 관문 시안(西安)을 가다
'서유기' 속 삼장법사의 천축 여행 출발지이자 서태후의 도피처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무르익었던 장안 시대의 화려함도 여전
당나라 때 수도였던 중국 시안(옛 이름 장안) 동북쪽에 있는 화청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무대였다. 방금 목욕을 끝내고 나서는 고혹적인 모습의 양귀비 동상이다. [중앙포토]
내가 시안(西安)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1991년 초여름이었다. 진시황 무덤을 지키는 병마용 군사들의 웅장한 모습에 감동했지만, 양꼬치를 파는 포장마차의 불빛이 밤길을 밝히는 풍경이 특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주작대가였는지 회민가(무슬림 거리)였는지 기억은 모호하다.  
시안에서 서쪽으로 법문사(法文寺) 가는 길 140㎞를 달렸다. 이번 여행 목적은 산시(陝西)역사박물관 개관식 참석과 몇 년 전 발견된 불사리(佛舎利,, 석가의 유골)를 보기 위해서였다. 불사리는 비에 의해 무너져 내린 불탑 지하 석실(石室)의 상자에 담겨있었다고 한다. 문헌과 비문을 통해 진골(眞骨)임이 확인되어 현재 불교계의 최고 성물로 꼽힌다.
법문사는 1800년 전 후한(後漢)시대에 건립된 절로 ‘아소카왕사(亜育王寺)’라고도 불린다. 불교를 국시로 삼은 고대 인도의 아소카 왕은 인도 통일을 위해 치른 많은 희생에 마음 아파하며 불교에 귀의해 포교에 힘을 쏟았다. 낯선 땅에까지 불탑을 세우게 하여 불사리를 분골한 것은 석가모니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유기>로 잘 알려진 현장(玄奘, 602-664년, 일명 ‘삼장법사’)이 장안(長安)에서 천축(天竺, 고대 인도)으로 떠난 것은 시안이 장안이라 불리던 당나라 때였다. 이세민(李世民)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부(父)왕을 유폐해 2대 황제(태종)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돼 사회는 불안정했다. 출국은 제한되어 있었고, 통행증이 없는 여행은 엄격히 금지됐다. 현장은 추격자를 피하기 위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뛰어서 이동했다고 한다.
소설 <서유기> 모태가 된 현장의 <대당서역기>
서유기는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다운 책이었다. 요괴와 도적이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이야기와 소박한 흑백 삽화가 내게는 색채가 풍부한 두루마리 그림처럼 다가왔고, 중국 오지 여행을 꿈꾸게 했다.
서유기는 현장의 구술(口述)을 제자 변기(弁機)가 기록한 지지(地誌)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당서역기>는 현장이 26세(629년) 때 천축으로 떠나 장안으로 돌아오기까지 17년의 여정을 담았다. 귀국 후 정리 번역하는 데에만 17년이 더 걸렸다고 한다.
인도 여행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온 현장에게 태종은 경전 번역을 국가사업으로 하는 대신 여행에 관해 상세히 보고하도록 명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기록이 <대당서역기>였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대당현장>(국내에선 ‘현장법사:서유기의 시작’으로 개봉)은 조용하면서도 생생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화양연화>로 잘 알려진 왕가위 감독 작품으로,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현장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현장의 여행은 처음에는 몸을 숨기기 바빴다. 그러나 점차 가는 곳마다 불법(佛法)을 청하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환대를 받게 된다. 뜻밖에 오래 머무는 경우가 있어도 그는 목적을 잊지 않았다. 동행자들이 위험 앞에서 그를 두고 떠나갈 때도 현장은 말 한 마리를 거느리고 홀로 여행을 계속했다. 그에게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그는 "초심을 잊지 말라"며 각오를 되새겼다. 사막에 쓰러져 생사의 경계를 헤매고 있을 때, 말이 스스로 곁에 누워 그를 싣고, ‘야마샘(野馬泉)’이라는 물가로 옮기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꿈과 현실이 아침저녁으로 바뀌고 여행 또한 인생처럼 제행무상하다고 현장은 말한다. 동반자나 인연이 있던 자들과, 그리고 말과도 마침내 길을 가른다. 후하게 대접해 준 인연으로 약속을 지키려고 귀로에 들른 고창국의 왕 국문태(麹文泰, 재위 624-640)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나라는 멸망한 뒤였다. 여행을 마친 현장은 멀리 장안의 거리가 보이는 곳에 서서 북받치는 감정에 못 이겨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산시(陝西)역사박물관 개관행사에서 중국 전통 복장을 갖춰 입은 악단이 전통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당나라 시대상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이 전시돼 있다. [사진 요시다 미치에]
당나라 때 하면 6대 황제 현종과 양귀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의 로맨스 무대였던 화청지(華清池)도 찾았다. 화청지 주위에 심어진 수양버들이 운치를 더했다. 현재의 화청지 풍경은 청나라 시대 풍경을 바탕으로 재현했다고 한다.
화청지는 시안 시가의 동쪽 약 30㎞ 떨어진 여산(麗山)에 있는 정원으로 중국 왕조가 대대로 온천지로 이용해 온 곳이다. 현종의 이궁과 ‘서부해당화의 목욕탕’이라 불리는 양귀비 전용 목욕탕이 있다. 양귀비를 서부해당화에 비유한 것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나온 잠에 취한 양귀비의 요염한 모습을 보고 현종이 “서부해당화 잠은 아직 부족할 뿐”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중국에서는 서부해당화 꽃을 양귀비의 이름을 따서 '수화(睡花)'라고도 한다.
자금성의 부귀영화 뒤로한 서태후의 도피처
‘경국의 미녀’로 불린 양귀비와 함께 중국에서 잘 알려진 여성은 ‘중국 3대 악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서태후(西太后)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 서태후는 베이징에서 장안으로 도피행각을 벌였다.  
청나라 말기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서태후가 1900년 8국 연합군의 공세를 피해 베이징에서 1200㎞ 떨어진 시안으로 도피했다가 환궁하는 가마 행렬 모습. [중앙포토]
청나라 말기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서태후가 1900년 8국 연합군의 공세를 피해 베이징에서 1200㎞ 떨어진 시안으로 도피했다가 환궁하는 가마 행렬 모습. [중앙포토]
중국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기독교 포교를 강요하는 열강을 향해 서태후는 선전포고한다. 서태후가 손을 잡은 의화단(義和団)은 민중의 대표를 자칭했지만, 실체는 종교적 비밀결사였다. 1900년 자금성을 포위한 열강 8개국 연합군이 포격을 가하자 서태후는 조카 광서제(光緒帝)와 그의 비, 측근, 호위병 등 10여 명과 노새 세 마리만 거느리고 서쪽으로 향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서민으로 변장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일행을 머물게 해주는 숙소가 없어서 회족(무슬림) 마을 모스크의 예배용 융단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여행 초반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고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북경에서 멀어질수록 서태후의 여행 소식이 퍼져 나갔고, 미식가인 서태후를 대접하고자 각지에서 호화로운 음식과 숙소가 제공되었다. 그래도 64세의 서태후에게 두 달여에 걸친 1200㎞ 여정은 몸과 마음 모두 힘에 부쳤을 것이다. 여행 도중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가까스로 장안에 도착해 몸과 마음을 추스른 서태후는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는 선언문을 광서제 이름으로 냈다. 여행에서 겪은 견문이 그녀의 마음을 바꾼 것일까.
실크로드의 동쪽 시작이 장안(시안)이라면 서쪽 종점은 로마(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다. 서역을 목표로 한 현장과 제자 혜성(慧性)이 파미르 고원 남서부에서 바미얀을 향해 남하한 길을 몇몇 모험가들이 반대로 따라가기도 했는데, 첫 번째 여행자는 1923년에 도전에 나선 프랑스 동양학자 알프레드 후셰(Alfred Foucher 1865-1952)였다. 후셰는 영문판 <대당서역기>를 지침서로 삼아 현장이 걸었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지만 춥고 험준한 고갯길에 결국 도중에 포기했다.
중국 시안에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 앞에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의 동상이 있다. 현장은 시안에서 출발해 17년에 걸친 '천축(인도) 여행'을 '대당서역기'로 남겼다. [중앙포토]
중국 시안에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 앞에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의 동상이 있다. 현장은 시안에서 출발해 17년에 걸친 '천축(인도) 여행'을 '대당서역기'로 남겼다. [중앙포토]
고대 중국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가 각각 사상은 달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중국사회를 지탱했다고 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위르스나르의 <동방기담 東方奇譚>(Nouvelles orientales, 1938) 중에 중국 도교 신선사상에 바탕을 둔 이야기가 있다. 동방기담은 유럽에서 본 동방의 전설과 이야기를 번안한 단편소설집이다. 
변화의 고통과 두려움은 분노가 되고
첫 번째로 수록된 단편 ‘왕포(王佛)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의 시작은 이렇다. [두 사람의 소지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영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무대는 한(漢)나라 때 중국, 돈보다 좁쌀죽 한 그릇에 만족하는 떠돌이 노화가 왕포와 그의 제자 영(玲)이 주인공이다.
부(父)황제에 의해 궁궐 안방에 갇힌 왕자는 왕포의 그림을 보며 자란다. 황제가 된 철부지 왕자는 현실세계에 실망했다. 황제가 현실이라 여겼던 왕포의 창조물은 너무나 뛰어나 현실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노화가에 대한 황제의 존경은 분노로 변한다.
황제는 왕포를 사로잡아 마지막으로 그림을 한 장 그리라고 명한다. 노화가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를 그렸다. 그리고 황제의 눈앞에서 현실과 그림의 경계를 넘어선다. 노화가는 그곳에서 목에 빨간 스카프를 두른 제자 영(玲)과 재회한다. 먼저 목이 베어져 처형된 제자 영의 표식이었다. 왕포는 영과 함께 스스로 그린 작은 배를 타고 그림 속 너머로 사라져 간다. 영혼의 구원을 그린 이야기이다.
2019년 시안 화청지에서 매일 밤 열렸던 무용극 ‘장한가’의 한장면.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를 바탕으로 만든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다. [중앙포토]
2019년 시안 화청지에서 매일 밤 열렸던 무용극 ‘장한가’의 한장면.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를 바탕으로 만든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다. [중앙포토]
실크로드 서쪽 끝 이스탄불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장편소설 <내 이름은 빨강>은 노화가 왕포의 이야기와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 16세기 오스만제국을 배경으로 궁정화가 살인사건을 다룬 추리소설이다. 술탄의 명을 받은 노화가와 이슬람의 전통 화법을 고집하는 세밀화 장인들의 표현을 둘러싼 대립이 그려져 있다. 노화가는 바늘로 자신의 눈을 찌른 뒤 술탄을 위해 일생을 바쳐 실명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여긴다. 왕포가 현실을 떠나 그림 속 세상에서 영혼의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은 살아있는 인간보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을 더 존중하며 현실보다 이념에 더 맹진한다. 현장이 불법 해석으로 물의를 빚는 세상을 우려해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것과 차원이 다르지만, 이따금 우리는 가벼운 친목 모임이나 취미에 불과한 스포츠 룰 해석을 놓고 다투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익숙함을 잃어버리는 고통과 변화를 두려워하는 감정은 분노가 된다. 자금성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예전처럼 화려한 생활을 되찾으려 한다. 화려하고 값비싼 의상, 거액의 비용을 들여 재건한 이화원(頤和園)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현장의 목숨 건 서역 여행도, 서태후의 도피행각도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지켜야 할 것과 바뀌어야 할 것 사이에서 사람은 흔들리며 살아간다.
요시다 미치에 20대에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귀국 후 남북한 뉴스를 주로 다루는 <신아통신>에서 번역 업무를 맡았다. 국회의원 비서, 한국문화원 근무를 거쳐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며 에세이를 쓰고 있다. 일본의 언론인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 인포넷에서 15년간 에세이를 연재했다. <조선왕조의 의상과 장신구>(2007, 공저), <한국 현대 문학>(1992, 번역서)을 저술했다. l 요시다 미치에 수필가, 번역가 wmyoshid@ybb.ne.jp

양귀비 노닐던 화청지엔 해당화 꽃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양귀비 노닐던 화청지엔 해당화 꽃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 월간중앙

내가 시안(西安)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1991년 초여름이었다. 진시황 무덤을 지키는 병마용 군사들의 웅장한 모습에 감동했지만, 양꼬치를 파는 포장마차의 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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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을 노래하며, 신선계를 연주하고, 날갯짓을 춤추다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의 무용도. 넓은 소매를 펄럭이며 훨훨 춤추는 모습에 취한 당나라 시인 이백은 해동에서 날아온 새와 같다고 표현했다. [사진 국가유산청]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
삼국시대 음악 ‘보여주는’ 국가대표 유물들
고구려 무용총, 소매 펄럭이는 춤과 송별의 합창을 그리다
거문고·가야금 역사 드러내는 백제금동대향로와 신라 토우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의 무용도. 넓은 소매를 펄럭이며 훨훨 춤추는 모습에 취한 당나라 시인 이백은 해동에서 날아온 새와 같다고 표현했다. [사진 국가유산청]
“금꽃 꽂은 절풍모 쓰고(金花折風帽) / 백마 타고 유유히 거닌다네(白馬少遲回) / 넓은 소매로 훨훨 춤추니(翩翩舞廣袖) / 새가 해동에서 날아오는 것 같구나(似鳥海東來)”
당나라 시인 이백의 악부시다. 당 현종의 부름을 받고 장안에 머물 때 고구려인의 춤을 보고 지은 시라고 전해진다. 이때가 서기 742년경이니 고구려가 멸망하고 70여 년이 흐른 뒤였다. 그러나 춤사위에 깃든 고구려의 우아한 멋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시선(詩仙)이 그 운치를 흘려보낼 리 없다.
넓은 소매를 펄럭이며 훨훨 춤추는 모습에 취한 이백은 해동에서 날아온 새와 같다고 노래했다. 고깔처럼 생긴 절풍모(折風帽)는 고구려인의 모자다. 무용총에 잠든 고구려 벽화 무용도의 춤사위가 당나라 수도에 아득한 꿈처럼 펼쳐졌다. 동방에서 날아온 새는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움에 사무쳐 퍼덕퍼덕 날갯짓하고 있었다.
세계 제국이라 일컬어진 당나라의 심장부에 배달민족의 맥박이 뛰는 장면이다. 오늘날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한류의 원형이 엿보인다. 삼국시대는 한반도 안팎의 수많은 소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고대국가를 이루며 겨레의 정체성을 싹틔우던 시기였다. 음악은 그 특색이 잘 드러난 분야 중 하나였다. 삼국시대의 음악, 곧 노래와 춤과 연주를 국가대표 유물들을 통해 만나보자.
고구려 소매 춤은 새의 날갯짓
“백성들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 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삼국지> 동이전 ‘고구려’)
중국 정사 <삼국지>에 묘사된 고구려 사람들의 인상적인 모습이다. <삼국지>는 3세기경에 서진(西晉)의 진수가 저술한 역사서다. 당시 중국에서 바라본 고구려인은 노래하고 춤추는 유희의 인간이었다. 여기에 악기 연주까지 더해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민족이었다. 그들의 가무악(歌舞樂)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생생히 담겼다.
고구려 상류층은 죽은 뒤에도 현세의 생이 계속되길 빌며 돌로 거대한 무덤을 조성하고 석실의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이때 죽은 사람의 인생에서 기념할 만한 행적과 평소 즐기던 것들을 뽑아 그림의 소재로 썼다.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행차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음악과 곡예를 즐기는 장면들이 단골 소재였다.
무용총은 압록강 너머 고구려 국내성 부근에 조성했던 4~5세기 고분이다. 이 굴식돌방무덤은 고구려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벽화들을 소중히 품어 안고 있다.
(시신을 안치한) 널방 서쪽 벽의 수렵도는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을 그렸다. 말 달리며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과 사슴, 호랑이 등 동물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담아냈다. 만주 벌판을 호령한 고구려인의 씩씩한 기상이 이 벽화에 오롯이 나타난다.
고구려 사람들의 노래와 춤과 연주를 만날 수 있는 무용도는 널방의 동쪽 벽에 그려져 있다. 그림 속의 광경은 말을 타고 집을 나서는 귀인을 위해 송별연을 여는 듯하다. 귀인의 앞에는 무용수 5명이 긴 소매 나부끼며 춤을 추고 있다. 새 깃털을 꽂은 모자, 조우관(鳥羽冠)을 쓴 선두의 무용수가 공연을 이끄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무용수들의 춤과 조우관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소매를 펄럭이는 춤사위는 필시 새의 날갯짓을 표현했을 것이다. 새를 하늘과 인간을 잇는 신령한 존재로 여겼던 고대 동방의 사고방식이 투영된 것이다. 시선 이백이 해동에서 새가 날아오는 듯하다고 고구려 춤을 묘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
중국 쓰촨성(四川省) 멘양(綿陽)에 있는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의 조각상. 이백이 당 현종의 부름을 받고 장안에 머물 때 고구려인의 춤을 보고 악부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사진 바이두]
무용수들의 아래쪽에는 합창단 7명이 줄지어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림 위쪽에는 악사 한 명이 서서 고대 현악기 완함(월금)을 연주하는데, 지금은 상체 부분이 깎여나가 덩그러니 다리만 보인다. 악사 앞에서는 또 한 명의 무용수가 연주에 맞춰 춤추는 중이다. 그림 속 가무악은 말에 올라 집을 나서는 귀인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귀인은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눈치챘겠지만, 귀인은 바로 무덤의 주인이다. 노래와 춤, 연주는 죽은 뒤에도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도록 한 것이다. 그가 향하는 천상계, 즉 하늘나라는 음악적 이상향이기도 하다. 신선들이 하늘을 훨훨 날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곳이다. (관악기) 피리와 나팔을 불고, (현악기) 금이나 비파를 타고, (타악기) 장구의 조상 격인 요고를 친다.
무용총에도 천상의 음악을 묘사하는 그림이 있다. 널방의 천장에 죽은 이가 내세에 거주할 하늘나라가 펼쳐진다. 연꽃과 사신(四神), 해와 달과 별자리, 기이한 짐승과 새, 그리고 선인(仙人)들이 그림에 담겼다. 무덤 주인이 소망하는 내세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림 속 선인들이 악기를 연주한다. 왼편 하단 달 아래를 보면 두 선인이 나무를 사이에 두고 네 줄로 된 금(琴)을 타고 있다. 거문고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현악기다.
무용총 천장에 그려진 거문고의 원형
“처음에 진(晉)나라 사람이 7줄로 된 금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그 소리를 알지 못했다. 이에 나라에서 후한 현상금을 걸고 음을 터득해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 마침내 재상 왕산악이 악기의 본모습을 보존하면서도 법제(구조와 주법)를 고쳐 만들고 100여 곡을 지어 연주했다. 이때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후에 줄여서 ‘현금(玄琴)’이라 불렀다. ”
 <삼국사기> 악지(樂志)에서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해 밝힌 거문고의 유래다. 검은 학이 와서 춤춘 금이라고 해 검은 금, 거문고가 된 것이다. 오늘날의 거문고는 6줄이 16개의 괘에 얹혀 있다. 그런데 무용총의 선인들은 17개의 괘에 네 줄이 얹힌 금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연주한다. 구조는 약간 다르지만, 괘와 술대(줄을 튕기는 채)의 모양이 비슷하고 금을 타는 동작도 흡사하므로 거문고의 원형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천장 그림 속 해의 뒤편에는 또 다른 선인이 뿔나팔을 불면서 하늘을 날고 있다. 끝이 뾰족하게 갈라진 저고리와 바지는 선인의 날개옷이다. 그는 높이 솟은 모자를 머리에 쓰고 길게 휘어진 뿔나팔을 분다. 날아가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부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나팔은 북과 함께 행렬을 이뤄 나아갈 때 주로 쓰였다. 행렬의 규모가 커지면서 관악기와 타악기를 중심으로 악기의 종류가 많아졌다. 이를 ‘고각(鼓角)’ 또는 ‘고취(鼓吹)’라고 한다. 황해도 안악 3호분의 행렬도에는 무려 64명의 고취 악대가 등장한다. 주인의 권력과 지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건국 직후에 “우리는 아직 북과 나팔의 의장을 갖추지 못해 비류국의 사자가 왕래할 때 왕의 예로 맞이하고 보내지 못하니 그들이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규보, <동명왕편>)이라고 못내 아쉬워했다. 북과 나팔은 왕권이나 국가 위상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인은 음악이 본래 천상계의 것이라고 여겼다. 악기 연주는 하늘나라의 조화와 질서를 소리로 나타내는 행위였다. 무용총의 천장 그림에 등장하는 거문고와 뿔나팔은 그러한 고구려인의 음악적 이상향을 드러낸다.
지난 5월 14일 일본 오사카·간사이 만국박람회 공연장에서 이재화 국가무형유산 거문고산조 보유자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백제금동대향로와 5인조 ‘뚜껑밴드’
백제의 음악을 ‘보여주는’ 유물은 국보 중의 국보다. 1993년 12월 12일 부여능산리고분군(백제왕릉원) 서쪽의 작은 계곡. 주차장 예정지의 문화재 발굴 작업을 진행하던 조사단이 절터 물웅덩이에서 예사롭지 않은 물건을 찾아냈다. 6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향로였다. 뚜껑, 몸체, 받침 부분을 각각 구리합금으로 주조하고 하나로 합쳐서 금으로 도금한 것이다. 이름하여 ‘백제금동대향로’다.
향로는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을 배경으로 삼아 선인, 동물, 산수를 정교하게 표현한 걸작이다. 봉황·인면조 등 상상력을 빌린 동물과 호랑이·코끼리 등 현실 세계의 짐승, 그리고 19명의 인물이 첩첩산중을 이룬 봉우리와 계곡 사이에 사실적으로 돋을새김되어 있다. 디테일이 예술이다. 창의성이 넘친다. 도교와 불교를 융합한 세계관 또한 흥미롭다.
이 향로 상단 뚜껑 부분에 5명의 악사가 빙 둘러앉아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오늘날로 치면 5인조 밴드다. 뚜껑 위에 있으니 ‘뚜껑밴드’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들의 머리 위에는 전설의 신수 봉황이 부리와 목으로 여의주를 품은 채 날개를 펴고 꼭대기에 서 있다. 마치 봉황의 가무에 맞춰 밴드가 합주하는 듯하다.
뚜껑밴드가 연주하는 악기는 완함, 퉁소, 배소, 북, 그리고 거문고로 보인다. 6세기 당시 백제에서 선호하던 악기들이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선 시기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빈번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두 나라 간의 음악적 교류가 긴밀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이 악기들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다. 모양은 물론 연주법까지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하다.
완함은 네 줄로 된 현악기로 공명통이 둥글고 목이 긴 게 특징이다. 그런데 백제금동대향로의 악사가 연주하는 것은 기법상 세 줄만 조각해 넣었다. 이 악기는 중국 서진의 문인으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었던 완함(阮咸)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비파를 잘 탔는데, 이를 개량해 새로운 현악기를 만들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완함은 5~6세기에 고구려와 백제에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공명통이 달을 닮아 월금(月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완함 연주자 왼쪽의 악사는 퉁소를 불고 있다(또는 피리라고도 한다). 더 왼쪽에 있는 악사가 연주하는 건 배소(排簫)다. 목관을 짧은 관에서 긴 관으로 차례대로 엮었는데, 관 하나에 한 음씩 나오도록 했다. 중앙아시아에서 탄생한 악기로 서양에 전해진 것은 팬플루트가 되었고, 동양에서는 배소로 발전했다.
완함 연주자 오른쪽의 악사는 북을 치고 있다. 항아리처럼 생긴 작은 북이다. 무릎 위에 올려 왼손은 북을 감싸 안고 오른손은 북채로 친다. 더 오른쪽에는 악사가 길쭉한 금(琴)을 눕혀 놓고 연주한다. 거문고처럼 술대를 쓰지만, 세 줄로 되어 있고 구조도 더 단순하다. 이 때문에 ‘백제금(百濟琴)’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무용총 천장 그림과 함께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뚜껑밴드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여성으로 보이는 백제금 연주자가 푸근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른다. 완함과 북을 연주하는 멤버들이 화음을 넣는다. 가만히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따뜻한 음색이 와 닿는다. 백제 왕국의 다정한 울림이 전해진다.
백제금동대향로 상단 뚜껑 부분을 보면, 5명의 악사가 빙 둘러앉아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라라페어]
 ‘신라금’을 연주하는 임신부 토우
고구려에 벽화, 백제에 향로가 있다면 삼국시대 신라의 음악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은 토우(土偶)다. 토우는 흙으로 만든 인형을 말한다. 신라 토우는 주로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무덤에서 깨어났지만 놀랄 만큼 생기가 넘친다. 얼렁뚱땅 빚은 것 같아도 표정이 살아있고 행동이 자유분방하다. 신라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들의 노래와 춤, 연주도 토우를 통해 친근하게 만날 수 있다.
‘토우 붙은 긴 목 항아리’는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30호 무덤에서 나온 국보다. 5세기 후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항아리의 목과 어깨 부분에는 거북이, 토끼 등 동물과 여러 사람의 모습이 다채롭게 표현되어 있다.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은 자연계의 생존 투쟁을 보여준다. 성애에 열중하는 육감적인 남녀의 형상은 생식욕으로 충만하다. 토우들이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다산과 풍요를 비는 신라 사람들의 마음이 담겼다.
그 한가운데 가야금처럼 생긴 현악기를 연주하는 여인이 있다. 배가 불룩하니 임신부임에 틀림없다. 새 생명에게 아름다운 음률을 들려주고 있을까? 다산과 풍요에 대한 열망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일까? 그녀가 연주하는 악기도 궁금하다. 원시적인 형태지만, 가야금의 특징인 양이두(羊耳頭)가 보인다. 양이두는 가야금 줄을 고정해 매어놓는 부분으로 양의 귀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 토우 장식 항아리가 제작된 5세기경에 신라 사람들은 가야금과 비슷한 ‘신라금(新羅琴)’을 연주하고 있었다. 신라 자비왕(재위 458~479) 때 살았던 음악가 백결선생도 그랬을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때 이웃 마을에서 곡식을 찧었다. 그의 아내가 절굿공이 소리를 듣고 ‘다른 집에서는 모두 곡식을 찧는데 우리는 곡식이 없으니 무엇으로 해를 넘기느냐’고 한탄했다. 이에 백결선생이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금(琴)을 연주해 절굿공이 소리를 냈다. 그것이 ‘방아타령’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졌다. ”(<삼국사기> 열전 ‘백결선생’)
백결선생은 ‘거문고의 달인’으로 알려졌지만, <삼국사기> 원문을 보면 그가 연주한 것은 ‘금(琴)’이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항아리 토우의 신라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이 현악기를 가지고 희로애락을 자유자재로 표현했다. 찢어지게 가난해 해를 넘길 곡식조차 없었지만, 방아타령으로 아내를 위로하고 음악가로서 일가를 이루었다.
가야금이 신라에 들어와 대표 악기가 된 것은 6세기 중엽의 일이다. ‘가야금(伽倻琴)’은 가야국 가실왕이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떠 만든 12줄 현금(十二弦琴)이다. 왕은 악사 우륵에게 명해 12곡을 짓게 했는데, 우륵이 그 악기를 지니고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에게 투항했다.
진흥왕은 552년에 계고, 법지, 만덕을 우륵에게 보내 음악을 배우게 했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세 사람은 우륵의 음악을 신라 정서에 맞게 고쳐 5곡을 뽑아냈다. 그들이 왕 앞에서 공연하자 한 신하가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이니 취할 것이 못 된다”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진흥왕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느냐”며 오히려 널리 연주하게 하고 대악(大樂)으로 삼았다(<삼국사기> 악지).
지난해 10월 26일 일본 나라국립박물관에서 개막한 제76회 쇼소인(正倉院·정창원) 특별전에서 한 관람객이 단망경을 들고 한국에서 건너간 옛 악기인 신라금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느냐?
토우는 항아리뿐 아니라 술잔에도 붙어 있다. 5~6세기에 제작된 술잔 뚜껑에는 노래하는 토우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타원형의 비파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고, 두 팔 벌리고 춤추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신라 서라벌에 노래방이 열렸었나? 술잔 토우답게 기분 좋은 취기가 전해진다.
혼성 듀엣도 있다. 노래하고 연주하는 한 쌍의 토우다. 여성으로 보이는 토우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젖힌 채 열창한다. 남성 토우는 경쾌하게 비파를 뜯으며 화음을 맞춘다. 노래의 기쁨에 푹 빠진 모습이다. 짜릿한 전율에 온몸이 떨려온다.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다. 케이팝의 유전자다.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가요로 읽는 한국사> (2025), <모함의 나라>(2022),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2023) 등을 썼다.l 권경률 역사 작가 kweonhistory@naver.com

생명력을 노래하며, 신선계를 연주하고, 날갯짓을 춤추다

 

생명력을 노래하며, 신선계를 연주하고, 날갯짓을 춤추다 - 월간중앙

“금꽃 꽂은 절풍모 쓰고(金花折風帽) / 백마 타고 유유히 거닌다네(白馬少遲回) / 넓은 소매로 훨훨 춤추니(翩翩舞廣袖) / 새가 해동에서 날아오는 것 같구나(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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