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周恩來)를 둘러싼 수수께끼들...(상편)

글: 진금운(陳錦雲)
주은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3가지이다:
첫째, 중공을 대표로 하는 "광휘론(光輝論);
둘째, 민간에 전해지는 주은래는 "인간미(人情味)"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셋째, 주은래는 노재(奴才)라고 욕하며, 모택동(毛澤東)의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애걸하고(搖尾乞憐),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꺾는다(低頭哈腰). 이 세 가지 평가는 모두 주은래에게 붙일 수 있다. 각각 약간의 사례를 찾아서 증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상호모순되는 증거들도 있어서 깔끔하게 입증할 수는 없다.
"광휘론"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주은래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중공건정이전에 중공의 착오노선중 제1차 진독수(陳獨秀)의 착오노선에는 그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을 제외하고, 그후의 구추백(瞿秋白), 이립삼(李立三), 왕명(王明)의 착오노선에 주은래는 매번 기여를 했다. 그리고 주요집행자이며 지도자였다; 다시 건정이후의 반우투쟁, 인민공사, 대약진, 그리고 문화대혁명까지 모두 주은래의 역할이 있었다. 그의 광휘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간미"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반박할 가치도 없다. 그렇다. 주은래는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 성공적으로 인간미가 넘친다는 도덕적 이미지를 구축했다. 예를 들어, 문혁때 일부 배우를 보호해주었다든지, 종업원과 얘기할 때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든지. 이런 류의 이야기는 대륙에서 수십권 출판되었다.
필자도 주은래에게 인간미가 풍부한 일면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주은래가 관건적인 경우에는 전혀 '인간미'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직접 지시에 따라, 통적반국죄(通敵叛國罪)로 자신의 양녀 손유세(孫維世)를 체포하게 하였다. 절세미인 손유세는 감옥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맞아죽는다. 그녀의 사후 몸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고, 수갑만 두 손에 채워져 있었다! 주은래의 인간미는 이때 어디로 갔는가? 유사한 사례는 주은래에게 인간미가 풍부하다는 사례만큼이나 많다. 이건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순하게 주은래는 모택동에게 꼬리를 흔들고 애걸하는 비열하고 유약한 소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과 저촉된다. 주은래는 모택동이 백성들에게 신으로 떠받들여질 때도 타도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 힘은 절대로 아부를 통해 형성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주은래는 확실히 큰 수수께끼이다. 모택동이 살아있을 때는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신령같은 광환이 사라지고, 보통백성들조차도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주은래가 살아 있을 때, 민중들은 그를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를 느끼는 점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주은래의 자료가 공개되면, 주은래의 수수께끼가 풀어질 것이라고. 필자가 보기에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자료가 지금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역시 그 자료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상계가 자료부족으로,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책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특히 그 인물이 당대에도 여전히 거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경우에는.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장악하고 있는 자료에 근거하여, 주은래의 모순현상에 대해 종합적인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의 수수께끼.
1924년, 주은래는 프랑스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한다. 그리고 즉시 막 설립된 황포군관학교 정치부대리주임(얼마 후 정식주임이 된다) 겸 국민혁명군 제1군 정치부 주임에 임명된다. 계급은 중장이고, 당시 나이는 26살이었다.
주은래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 출국해서 소위 유학을 몇년 하고나서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큰 임무를 맡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여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를 습관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라고 여겨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기록을 뒤져보면, 의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국민당 측에서 보면 그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 공산당 측에서 보면 그는 약간의 공로가 있지만, 그건 소소하기 그지없다. 그럼 주은래의 그 시기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5.4운동전날, 그는 남개중학(南開中學)에서 십여명의 학생으로 "각오사(覺悟社)"를 조직하며, <향도(嚮導)>라는 제목의 잡지를 발간하고, 1,2편의 사상이 간단하고 유치한 글과 몇 개의 시처럼 보이는 시를 발표한다. 그리고 남개학생화극단(話劇團)(당시에는 文明戱라고 불렀다)에 참가하며 거기에서 여자주인공역할을 맡았다.
5.4운동때, 남개학생을 조직하여 길거리로 나가 시위하다가 체포당한다. 반년간 수감된 후 석방되고 프랑스로 근공검학(勤工儉學, 일하면서 공부하다)을 떠난다.
프랑스기간동안 소년공산국제(少年共産國際) 중국지부(中國支部) 서기(書記)를 지낸다. 21년 중국공산당이 건립된 후에는 중국공산당 여구지부(旅歐支部) 서기(書記)로 전환된다. 그 뿐이었다.
그런데도 황포군관학교에서 정치부 주임의 직위를 맡는다. 그 직위는 장개석(蔣介石) 바로 다음가는 고위직이다.
어떤 사람은 주은래가 비약적으로 지위가 상승한 것이 등영초(鄧潁超)의 공로라고 말한다. 등영초가 주은래의 귀국전에 중공당내에서의 지위가 주은래보다 높았는데, 그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아직 귀국하지 않은 남자친구의 자리를 알아봐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등영초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녀의 공적은 주은래만도 못했고, 등영초 본인도 수직상승한 사람이다. 그녀는 예쁘지도 않고 가족배경도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빠르게 직위가 올랐을 뿐아니라, 그녀보다 더욱 빠르게 직위가 오르는 남자친구를 가졌다.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는 것일까?
관건은 주은래가 귀국하는 도중에 품 속에 추천서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추천서의 작성자는 제삼국제(第三國際) 집행위 서기로, 스탈린의 가까운 친구이며, 불가리아공산당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이고, 추천서의 수신인은 당시 소련에서 중국에 파견하여 손중산(孫中山)을 도와 군대를 훈련시키며, 황포군관학교를 건립한 미하일 보로딘(중국명 鮑羅廷)이다. 보로딘은 그 추천서를 받은 후, 두 말 하지 않고, 주은래를 정치부 주임에 임명한다. 그리고 중장계급을 이 전혀 전쟁터에 나가 본 적도 없는 청년에게 수여한다.
이를 보면, 주은래와 디미트로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가 프랑스에서 비록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유학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성장할 지름길을 간 것이다.
디미트로프는 당시에 세계공산당 정보국의 주석이었다. 주은래는 바로 중공특무조직를 만든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훈련했는지는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그가 황포군관학교 설립전날 귀국하게 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사실상, 미하일 보로딘은 일찌감치 제삼국제에서 훈련을 받은 중국동지를 귀국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은래가 가져온 추천서는 그저 그의 신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이 관계를 알고 나면, 등영초가 고속승진한 원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은래가 유럽에 있는 기간에 만일 국내에서 새로 성립된 공산당과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면, 그의 이후 발전이나 당내에서의 지위에 불리했을 것이다. 등영초는 이 연락인의 역할을 맡았다. 주은래는 공산국제와의 관계를 통해 등영초의 지위를 급속히 끌어올렸고, 지위가 올라간 후 등영초는 다시 주은래를 위해 효과적으로 활동했다.
제삼국제에 있어서, 주은래는 중공을 조종하는 도구였다. 그리고 중공에 있어서, 주은래는 제삼국제의 중국대표였다.
중공은 당시 완전히 모스크바와 제삼국제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를 인정하는지에 따라, 그가 중공에서 요직을 차지한다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었다. 중공당사에도 이 사실을 감추지 않고 있다.
모스크바와 제삼국제에서는 각국 공산당강부를 훈련시키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 두 곳은 실제로 하나이다. 제삼국제는 완전히 스탈린의 명을 듣는다. 경비도 소련이 제공한다. 그렇다면 하나인데 왜 둘로 나누었을까?
그건 스탈린의 외교상의 고려이다. 본국경내에서 외국인을 훈련시키고, 어떻게 자신의 정부에 무장반란을 일으킬지를 가르치게 되면, 외교적인 마찰을 불러올 수 있다. 그리하여, 군사 및 스파이훈련은 제삼국제가 소련국외에서 실행했고, 모스크바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조직훈련을 책임졌다.
이렇게 하여 중공초기의 간부는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 유형의 인물들로 구성된다:
제1유형은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구추백, 왕명등.
제2유형은 제삼국제세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즉 주은래를 위시한 유럽유학생.
제3유형은 모택동식의 토착성장파.
제1유형은 정치적 명망이 가장 높고, 흠차대신의 신분으로 상방보검을 들고 귀국했다. 그래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다. 다만 이런 류의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건 독불장군이라는 것이다. 당내에 위로부터 아래로의 조직계통이 없고, 당내에서 의견불일치나 잔혹한 투쟁이 벌어질 때, 이런 류의 인물은 희생당할 운명에 처해진다. 뒤의 두 유형은 비록 명망에 있어서 모스크바파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조직이 있어, 진정한 실력파라 할 수 있었다.
인간관계를 보면, 주은래는 표면적으로 모스크바와 관계가 비교적 소원하다. 그는 단순히 소련을 '거쳐온' 바 있을 뿐이다. 다만 실제로, 그는 직접 모스크바에서 온 중공간부들보다 더욱 소련공산당 최고위층과 가깡웠다. 그는 당시 당내에서 진정한 "통천(通天)"인물이었다. 소련공산당은 그에게 소련색채를 많이 입히지 않았다. 단지 외부에서 주의를 끌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이 '도구'를 더욱 손쉽게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보로딘이 직접 모스크바에서 온 중공간부를 황포군관학교에 심었다면, 드러내놓고 손중산의 국민정부군대를 조종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주은래를 기용한 것은 어느 정도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고, 사람들로 부터 말이 나오는 것을 막는 작용을 했다.
이렇게 하여, 주은래는 비록 모스크바 흠차대신이라는 이름은 없지만, 흠차대신이라는 실리는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은래가 유럽유학시기에 얻은 성취를 정리해보자:
그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심복이 된 외에, 여구지부를 이용하여, 그를 우두머리로 하는 방파체계를 건립한다. 이 방파체계는 그의 일생에 매우 중요하다. 그건 소속인원의 명단만 봐도 알 수 있다: 주덕(朱德), 섭검영(葉劍英), 등소평(鄧小平), 진의(陳毅), 이부춘(李富春), 이입삼(李立三), 이유한(李維漢), 섭영진(聶榮臻), 채화삼(蔡和森, 귀국후에 중공정치국위원이 되고 한때 중앙서기가 된다), 운대영(惲代英, 귀국후 중공광동성위서기가 된다), 진연년(陳延年, 진독수의 아들, 광주구위서기), 향경여(向警予, 채화삼의 처, 귀국후 정치국위원이 되다), 채창(蔡暢, 채화삼의 여동생, 중앙위원).
당시 유럽에 유학한 중국청년들은 정치적견해가 서로 달라서, 중국의 앞날에 대해 논쟁을 계속했다. 심지어 서로 주먹질까지 했다. 주은래는 항상 조정자 역할을 했다. 이는 그로 하여금 서로 다른 정치파벌들 사이를 알선하는 외교재능을 크게 단련시켜준다.
오뚜기(不倒翁)의 수수께끼
국공합작이 결렬되면서, 장개석은 상해에서 중공에 추살령을 내린다. 중공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무장역량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주은래의 배경과 작용은 중공당내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그는 제삼국제의 지시를 받아, 주덕, 하룡(賀龍), 섭검영등으로 하여금 남창의거(南昌起義)를 일으키게 한다. 얼마 후, 모택동도 추수의거(秋收起義)를 일으킨다. 모택동의 풀뿌리성과 자발서은 그로 하여금 편벽한 산간지역으로 가서 점산위왕(占山爲王)하는 것을 선택한다; 주은래는 제삼국제의 지시를 받아 광주를 공격한다. 그러나 절반도 진행하기 전에 이미 칠,팔할의 사람을 잃어버린다. 나머지는 할 수 없이 주덕이 이끌고 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가 모택동의 근거지로 숨어들어야 했다. 주은래는 여전히 상해, 광주등 대도시에서 도시폭동과 암살등을 기획한다.
소련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시에서 의거를 일으켜야 했다. 주은래는 비록 연전연패하고, 수하의 인마도 열에 아홉은 잃었지만, 시종일관 굳건하게 제삼국제의 지시를 집행했다. 스탈린은 모택동이 산간지역을 근거지로 삼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불만이었고, 그에 대해 "부농노선(富農路線)"이라고 비판한다. 주은래는 명을 받아 상해에서 강서(江西) 서금(瑞金)으로 간다. 그리고 직접 지휘한다. 진의를 보내 모택동의 병권을 탈취하고, 모택동의 직위를 면직시키고 정치국에서 쫓아낸다.
스탈린을 맹종한 결과는 강서근거지조차 와해되어 버린다. 부득이 철수하고 이동해야 했다. "장정(長征)"을 진행한다. 연이어 패전했기 때문에, 사기는 바닥이었고, 군심은 흩어졌다. 매일 많은 병사들이 도망쳤다. 10만명이 준의(遵義)에 이르자 겨우 2만명이 남는다. 이 대오는 철저한 와해에 직면했다.
중공은 매번 중대한 실책이 있을 때마다 항상 희생양을 찾아냈다.
제1차는 진독수이다. 제2차는 구추백이고, 제3차는 이입삼이다. 2,3차 좌경노선의 구체적인 집행자는 모두 주은래이다. 다만 그는 당내의 지위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제4차에 소위 왕명, 박고노선에는 주은래의 군사상책임이 더욱 크다.
다만 기괴한 점은 모택동과 왕가상(王稼祥)이 준의회의때 반기를 들 때 창끝은 박고를 향하고, 주은래는 전혀 다치지 않는다. 이틀밤낮에 걸친 투쟁의 결과는 박고가 권력을 내놓는 것이었다. 박고의 실패는 주은래가 모택동지지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박고는 철저히 무너지고, 그가 모스크바에서 데려온 "이십팔개반볼세비키"까지 함께 무너진다.
이는 소련공산당이 중국공산당을 조종함에 있어서, 인사규모가 최대인 경우이고, 또한 가장 참담하게 실패한 경우이다. 그후 소련공산당은 정치군사 및 조직인사에서 더 이상 중국공산당을 완전히 조종,통제할 수 없게 된다. 군사상의 계속된 실패는 "큰형님"의 위신을 무너뜨렸다.
동시에 엄중한 실수를 저지른 주은래는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다.
새로 성립된 지도핵심 3인소조 가운데 주은래는 여전히 이름을 남겨놓았다. 서열순서로는 모택동, 왕가상, 주은래이다. 왕가상도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인물이지만, 손에 쥐고 있는 병력이 단 한명도 없었다. 이 삼인지도소조는 실제로 2인지도소조였다.
주은래가 이번에 무너지지 않은 원인은 모스크바의 배경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준의회의에 참가한 사람의 명단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주은래의 세력이 거의 8.9할을 차지한다. 모택동이 주은래까지 공격하였다면, 아마도 그 자신이 먼저 액운에 처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설사 이겼다고 하더라도, 이긴 결과는 이 완전히 망가진 군대를 다시 둘로 나누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주은래의 군대와 모택동의 군대로. 그렇게 되면 아마 둘 다 장개석에게 소멸당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 군대는 여전히 소련으로부터 물자원조를 필요로 했다. 이 외국지원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려면, 지도부에 반드시 모스크바에서 신뢰하는 인물을 포함시켜야 했다. 당시의 병사들은 박고, 주은래같이 항상 패전만 하는 해외유학파장군들에게 아무런 신뢰가 없었다. 그들이 계속 지휘관으로 남아 있으면 아마도 병사들은 다 도망쳤을 것이다. 병사들에게는 사기를 고무시키는 수령이 필요했다.
모택동은 일찌기 정강산에서 몇차례 승리를 거둔 바 있다. 그리고 이 군대의 다수 사병은 주덕, 모택동이 우두머리로 있을 때, 모은 사람들이고, 그리하여 모택동을 수령으로 추대하여, 이 패잔병을 다시 응집시켰다.
이런 말이 있다.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특정한 정세는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용납해야하는 국면이었다.
모택동은 과연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장정'의 승리를 거둔다. 모택동은 연안에서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은 왕가상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모스크바에서 온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두 마리의 호랑이가 공존하는 국면에서, 반드시 완충역할을 하는 중간인물이 필요했다. 그는 모스크바와 관계가 너무 깊지 않으면서(모택동이 믿지 않는다) 자신의 세력과 조직계통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주은래가 마음을 놓지 못한다). 다만 당내에서는 상당한 경력이 있어야 했다.
모택동은 유소기(劉少奇)를 선택한다. 유소기는 계속하여 지하공작에 종사했다 .다만 지하당조직은 이미 기본적으로 장개석에게 파괴당했다. 그는 모택동과 함께 일을 하기도 했고, 모스크바로 가서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내에는 자신의 세력이 없었다. 그러나 상당한 경력이 있었다. 이는 중간인의 역할을 하는데 충분했다.
모택동은 유소기를 끌어올린 후, 수년간의 운영을 통해 주은래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생각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연안정풍'운동이다. 반세기전의 정풍운동에 대하여, 중공은 지금까지도 말을 아낀다. 관련자료도 공개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단지 주은래가 정풍운동당시 반성문을 썼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다만 주은래의 실력이 크게 줄어들지는 않은 것같다. 왜냐하면 그의 지위는 여전히 공고했기 때문이다.
다만, 연안정풍이 조성한 최대의 악영향은 모택동이 마르크스의 노동제계급이 가장 혁명적이고 가장 선진적이라는 구호를 받아들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경제수요에 기해 분석한 결론을 노동자농민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혁명이라는 것으로 임의로 고쳐버린다. 그리하여 지식분자에게 노동자농민군중에게 배우라고 요구한다. 이런 수정의 실용목적은 여론적으로 심리적으로 당내 주은래의 유학파를 억누르기 위함이다.
실력에서 상대방을 타도하기 어려울 때, 먼저 여론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것은 모택동의 관용적인 기량이다.
중공건정후, 모택동은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계속하여 지식분자를 비판한다. 그리하여 전체 인민에 사상유례없는 문화호겁을 초래한다. 결국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
주은래(周恩來)를 둘러싼 수수께끼들...(하편)
글: 진금운(陳錦雲)
유소기는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지금까지 국내외여론은 여전히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권력투쟁으로 보거나 혹은 모택동노선과 유소기노선의 투쟁으로 본다.
만일 정말 그러했다면, 문화대혁명을 시작하고 반년만에 유소기는 타도된다. 모택동은 이미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왜 문화대혁명을 끄내지 않고,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하다가, 다른 사람이 끝내게 만들었을까?
만일 지속한 목적이 유소기의 잔여세력을 제거하기 위함이라면, 왜 타도된 각급간부는 임표(林彪)가 타도된 후 절대다수가 다시 '해방'되어 다시 기용되었을까?
문화대혁명을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투쟁으로 보는 것은 확실히 이런 문제에 대답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제1호 주자파 유소기는 홍위병에게 끌려가 심하게 비투당하고 마구 폭행당하다가 결국 감옥 안에서 참혹하게 죽는다.
제2호 주자파 동소평은 보호받아, 강서농장으로 내려간다.
제3호 주자파 도주(陶鑄)의 최후는 유소기와 같다.
제4호 주자파 담진린(譚震林)은 회인당(懷仁堂, 모택동의 거처)에서 소란을 부리고, 그 자리에서 강청(江靑)을 욕했지만, 평안무사했다.
이 현상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홍위병의 미친듯한 공격을 피해간 사람은 모두 주은래의 적계(嫡係)이다.
이런 말이 있다. 개를 패려면 그 주인을 봐야 한다. 모택동이 만일 주은래의 적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주은래 및 그의 파벌과 공개적인 결전을 의미한다. 다만 모택동은 유소기를 가볍게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주은래의 세력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거리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소기를 쓰러뜨린 위력으로 주은래의 진영도 한번 휩쓸기는 하지만, 직접 개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중공 지금까지도 모택동과 주은래간의 문혁때의 투쟁에 대하여 제대로 말을 하지 않고 있고, 심지어 황당무계하게도 주은래가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라고까지 말한다.
그들이 그렇게 선양할 때는 분명 그것이 주은래의 "빛나는 이미지"를 해칠 수 있다는 점을 잊은 듯하다. 모택동이 죄악의 문화대혁명을 이르켰는데, 주은래가 시종 그의 친밀한 전우였다면 마찬가지로 문혁의 책임을 벗어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또한 주은래의 "빛나는 이미지"를 위해 그와 모택동간의 충돌을 선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문혁때, 주은래는 확실히 모택동을 옹호하는 일들을 많이 했기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공의 난감함이다.
지나치게 모택동을 부정할 수 없다. 지나치게 부정해버리면 주은래도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모택동을 긍정할 수도 없다. 지나치게 긍정해버리면, 등소평의 통치에 문제가 생긴다.
주은래를 옹호하는 일부 인사들은 주은래와 모택동의 충돌을 정확한 노선이 잘못된 노선을 막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증거는 전혀 내놓지 못한다. 주은래가 사회발전의 도로문제에서 모택동과 진정으로 대항하고 투쟁한 적이 있다는 점에 대하여.
그는 단지 한 곳에서 모택동에 극력 항거했다; 즉, 전력을 다하여 그의 방파체계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하고자 했고, 이것이 그에게는 지고무상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을 위하여 그는 모택동에 영합할 수도 있었고, 모택동에 저항할 수도 있었다.
이 원칙을 위하여 그는 여하한 사회정의와 이상도 희생시킬 수 있었고, 이 방파체계 밖에 있는 사람은 그의 이 원칙으로 인하여 희생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소기 문제에서, 가장 분명하게 그의 이런 "빛나는 이미지"의 "위인"이 실제로는 권력욕과 사심이 극히 크고, 자신을 보호하는게 최우선이며, 성격이 유약한 인물이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유소기는 중공당내에서 자신의 방파세력이 없었다. 그는 모택동의 발탁에 힘입고, 모택동을 극력 찬양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문혁때 그와 그의 반도집단을 타도했는데, 겨우 61명에 불과했다. 그중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은 중앙서기처 서기 겸 북경시장 팽진(彭眞)과 전 공안부장으로 문혁전에 총참모장으로 옮겨간 나서경(羅瑞卿)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문화, 교육, 선전계통에 속했다. 유소기가 이들 몇몇 아무런 실력도 없는 인물들을 데리고 모택동에 반기를 들 수 있었을까?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아마도 그가 모택동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은 모택동의 의심때문이고 그래서 억울한 오명이었을까?
유소기는 비록 드러내놓고 모택동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모택동을 허수아비로 만드려는 거동은 확실히 수년간 존재했다. 모택동은 문혁전에 요문원(姚文元)의 글을 <인민일보> 혹은 <북경일보>에 싣고자 했으나, 완전히 무시한다. 이는 유소기, 팽진은 이미 모택동을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약진에 실패한 후,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당내 칠천인대회에서 반성한다. 유소기는 비록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직설적으로 대회에서 영수는 신이 아니고, 잘못을 범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된다. 만세를 부르는 것은 봉건주의이다. 모택동은 결국 어쩔 수 없이 2선으로 물러났고, 더 이상 경제문제에 간여하지 못하게 된다.
독불장군이나 다름없었던 유소기가 어디에서 그런 힘을 얻었을까? 그리고 모택동을 물러나게 해서 반은퇴상태로 만들었을까?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유소기가 모택동 진영에서 벗어나, 주은래와 연맹을 결성했기 때문이다.
60년이후, 등소평은 중앙서기처업무를 모조리 부하인 팽진에게 처리하게 맡기고, 자신은 그저 브릿지게임에 집중한다. 정치국회의에 참석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모택동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는다. 이는 주은래파가 일찌감치 유소기파를 모택동과 직접 충돌하는 마전졸(馬前卒, 장기에서 희생용으로 내보내는 장기말)로 삼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 둘이 연합하면, 중앙고위층권력은 기본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7명의 정치국상위중에서, 모택동의 심복은 임표 한명만 남는다. 그리고 임표는 신중국이 건립된 이후,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정치국회의에 참석하는 경우도 극히 적었다. 그중 하나의 원인은 그는 척추신경에 총상을 입어, 몸이 아주 허약했고, 바람, 빛도 무서워하고, 더운 것이나 추운 것도 무서워하기 때문이었으며, 또 다른 원인은 그가 반군여반호(伴君如伴虎)라는 이치를 잘 알았고, 자신은 공고진주(功高震主, 신하가 공을 너무 많이 세워서 주군이 경계할 정도에 이르다)의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아서, 모든 일에서 한발 물러서 있었다.
이렇게 하여 모택동은 정치국에서 고가과인(孤家寡人)이 되어버렸다.
군대내의 세력을 보면, 유소기는 전혀 끼어들지 못했지만, 주은래는 최소한 모택동과 대등한 수준이었다. 8대원수중에서, 주은래의 권력은 모택동보다 컸다. 모택동이 여산회의때 그의 충신 팽덕회(彭德懷)를 제거해버린다. 나영환(羅榮桓)은 문혁전에 병사한다. 십대원수는 이제 8대원수만 남았고, 주은래, 유소기의 계산으로, 그들이 점차 모택동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전술은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당내의 고위간부들 중에서, 모택동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고, 유소기의 위신은 계속 상승한다. 문혁전에는 이미 모택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된다.
아쉽게도 그들이 설계한 계획에서, 하나의 큰 실수가 있었다: 그들은 모택동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모택동으로부터 실권을 분리시키는 동시에, 여론방면에서는 크게 모택동을 찬양한 것이다.
1965년, 모택동은 자신의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나서경을 총참모장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온 공안부장을 내보낸다. 나서경은 달콤한 말로 모택동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고, <홍기(紅旗)> 잡지에 <모택동사상의 절대권위를 크게 특별히 세우자>는 글을 발표한다. 그들은 모택동이 점차 허수아비로 되고, 자신을 모택동사상의 가장 뛰어난 계승자라는 이미지를 심으면, 모택동이 반격할 힘을 잃을 것이라 여겼다. 그들은 모택동을 너무 저평가했던 것이다.
모택동이 정교하게 준비한 반격방식은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상대방이 자신과 민중을 마비시키기 위해 개인숭배를 진행하자, 그 흐름을 타고 북경을 아예 떠나 상해, 항주에 머문다. 그리고 직접 라디오, TV를 통해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 수천수백만의 무지한 민중과 열광적인 청년들로 하여금 조반(造反)하도록 선동했고, 전국은 신속히 마비상태에 접어든다.
모택동은 이때 민간에서 이미 "신"과 같았다. 민중은 누구든 그에게 불경하면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벌떼처럼 몰려가서, 물어뜯었다.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모택동은 전국에서 조반을 호소하기 전날, 임표에게 38군을 북경으로 이동시키도록 밀명을 내린다. 임표에 있어서, 이번 권력투쟁에 참여하지 않고, 군대를 이동시키지 않더라고, 유소기, 주은래는 자신을 숙청할 것이다. 그리하여, 임표는 63년부터 모택동 신격화의 대합창에 참가한다. 후계자라는 이미지특허를 유소기, 주은래일파가 독점하도록 돠둘 수는 없었다.
모택동이 북경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는 것은 그가 정말 주은래와 군사결전을 벌이는 것까지 각오했다기보다는 그저 결전까지 각오하고 있다는 자세를 보이려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모택동은 주은래의 성격을 잘 알았다. 과연, 주은래는 예상외의 반격과 상대방의 막무가내식의 자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수치스럽게도 물러나고 만다. 그는 유소기를 포기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지킨다. 그리하여 모택동의 혼란을 부추겨 승리를 거두겠다는 리스크를 건 행동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중공에서 주은래를 변호하는 견해로는 이런 것이 있다: 주은래는 당시 대국을 고려하여, 부득이 인욕부중한 것이다. 만일 그가 대국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전국이 혼란에 빠져 수습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공장이 기계를 멈추고, 학교는 수업을 멈추고, 도처에서 총포성이 울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무슨 고려할 대국이라는 것이 있단 말인가?
민간에서 적지 않은 보통백성들 중에는 유소기가 피흘리는 내전을 피하였다는 것을 들어, 요직에 있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주은래와 비교하여, 누가 더 사회정의를 위하고, 민족운명에 관심을 가졌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주은래는 유소기를 배신했고, 목숨을 걸고 항쟁한 많은 민중을 배신했다.
소위 대국을 고려한다는 말은 그의 관료소집단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주은래는 유약하고, 아무런 정치적이상이 없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떠올리는 성격이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가볍게 유소기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모택동은 주은래만 쓰러뜨리면 절대권위의 지위가 진정으로 공고해질 수 있다고 여긴다.
유소기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모택동은 주은래에 대한 공격을 준비한다.
제1차는 홍위병 연동(聯動)조직을 이용했다. 북경의 길거리에 대자보를 붙이고, 주은래가 27년 "4.12"대학살기간 체포된 다음, 신문에 <오호(伍豪, 주은래의 당시 가명)탈당계사(脫黨啓事)>를 싣고서 석방되었다는 자료를 공개하면서, 공산당의 기율에 따르면, 체포된 후 탈당성명을 발표하고 석방된다는 것은 바로 반도(叛徒)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 경력에 대하여 주은래는 이렇게 해명한다: 그가 체포되었을 을때, 국민당의 병사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를 그냥 일반당원인 줄 알았다. 그의 황포군관학교 제자이자 백숭희(白崇禧)의 동생인 백양(白洋)이 소식을 듣고 감옥으로 와서 그를 석방시켜주었다. 탈당계사의 건은 그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출옥한 후, 백양이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주은래의 명의로 실은 것일 뿐이다.
명확한 반도의 근거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찌감치 십팔층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연동(聯動)"구성원들에게 반혁명죄를 씌워 모조리 체포한다.
제2차는 임표와 중앙문혁소조 왕력(王力), 관봉(關鋒), 척본우(戚本禹)를 통해 군내 한줌도 되지 않는 주자파를 솎아내자는 구호를 내세운다. 그러나 주은래의 군대내세력의 격렬한 저항에 부닥친다. 거의 결전도 불사할 태세였다(즉, 저명한 무한병변(武漢兵變)과 대뇨회인당사건(大閙懷仁堂事件)이다). 모택동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왕, 관, 척을 희생양으로 버린다. 군대내의 분열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모택동은 결국 임표를 희생양으로 삼아 충돌을 종식시킨다.
제3차는 비공비수호(批孔批水滸)도 마찬가지로 결국 모택동이 물러나면서 실패로 끝난다. 주은래가 어떻게 모택동의 공격을 막아냈는지에 대하여 중공의 관련자료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해외여론은 모택동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하게 된 것은 강청(江靑)이 모택동을 속이고 주은래를 끌어내리려 했다고 말하면서 모든 죄를 강청에게 뒤집어 씌운다. 기실, 강청은 재판때 이미 진실을 까발린 바 있다: "나는 모주석의 한 마리 개이다. 나에게 누구를 물라고 하면, 나는 그를 물었다!"
제3차 주은래공격에 모택동은 이미 강청을 직접 등장시킨다. 모택동은 이때 손안에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써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주은래는 단지 <홍도여황(紅都女皇)>사건으로 반격한다. 강청은 외국과 내통하여 당과 국가를 팔아먹었다는 비판을 받고 위신이 바닥에 떨어졌으며, 더 이상 기염을 토할 수 없게 된다.
모택동이 승리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은래보다 8개월을 더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은래의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기에는 힘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그저 등소평을 물러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너무나 짧았다. 주은래의 세력은 무너지지 않았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사람도 여전히 그였다.
그러나, 주은래가 인간으로서 혹은 정치인으로서 정말 승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주은래를 위해 변명한다. 당시 주은래가 만일 모택동과 공개적으로 맞섰더라면,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없었을 뿐아니라, 그 자신마저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 공개된 사실을 보면, 근본적으로 이런 결론에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잠정적으로 2건의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하나는 66년 겨울, 모택동이 항주에서 원격조정하고, 강청이 북경에서 홍위병을 교사해서 중남해로 쳐들어가고 국무원을 포위하게 한다. 그리하여 주은래는 24시간동안 포위되어 있었다. 주은래는 홍위병들에게 해산하라고 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군대는 대노하여 군대지휘관 한명이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가, 국무원을 포위하고 있던 홍위병들에게 총탄을 쏜다. 주은래의 말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사건은 주은래 본인이 직접 문혁발생후에 인터부했던 에드가 스노에게 토로한 것이다. 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오히려 홍위병이 반혁명집단의 교사를 받은 것이라고 하며, 주은래포위사건에 가담한 우두머리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다.
다른 하나는 무한병변이다. 이건 더욱 유명하다. 모택동은 군대에게 지방의 좌파를 지지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무한군구는 우파를 지지한다. 모택동파 중앙문혁소조의 조장 왕력은 무한으로 가서, "군내 한 줌도 안되는 주자파를 솎아내는" 사건을 일으킨다. 무한군구사령원 진재도(陳再道), 정위 종한화(鍾漢華)는 아예 왕력을 체포해 버린다. 그들은 모택동 본인도 무한으로 와서 독려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수십만 시민을 동원해 무한공항을 포위해서 모택동을 막으려 한다. 모택동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뺀다. 그리고 주은래가 나서서 국면을 해결한다. 주은래는 진재도를 북경으로 데려와 군내직위를 면직시킨다. 그러나 그는 문혁때 가장 먼저 명예회복된 사람이다.
이를 보면, 진재도같은 일개 군구사령원도 공공연하게 대항했다. 모택동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주은래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모택동은 문혁때 여러 차례에 걸쳐 주은래를 처리하려고 했으나 실패한다. 이를 보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주은래가 만일 조금만 더 용기를 가졌다면 그리고 전체인민의 이익을 생각했다면, 중국백성들리 십일년간이나 문혁의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주은래가 유소기와 마찬가지로 신속히 무너졌더라면 문혁도 일찌감치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겁은 많으면서, 권세는 많이 가진 인물이어서 양진영이 대치하면서 민중들은 11년간이가 고난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주은래의 일생에 만일 후회가 있다면, 분명 유소기를 버린 것일 것이다. 그건 얼마나 수치스러운 양보였던가?
유소기가 감옥에서 참혹하게 죽을 때, 입으로 욕하고 가장 원한을 품었던 사람은 모택동이 아니라, 주은래였다.
주은래의 "연기"
1970년 여름, 여산에서 개최된 중공9기 2차회의에서, 모택동은 돌연 진백달(陳伯達)을 비판하고 임표도 연루된다.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택동이 임표에게 불만을 가졌다는 소식을 전한다.
회의가 끝난 후, 주은래는 즉시 북경으로 돌아가 사무를 처리하지 않고, 99명 당정군 고위간부들을 남게 한다. 명목은 주은래가 모택동사상보고를 활용하여 학습하겠다는 것이다. 회의에서 주은래는 당금형세는 전혀 얘기하지 않고, 역사를 회고한다. 그리고 옛날 진의를 보내 모택동의 군권을 탈취했던 사실을 털어놓는다.
이 역사를 참석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주은래는 모택동과 계속하여 친밀한 전우라고 여겼다. 지금 주은래가 옛날 일을 끄집어내자 깜짝 놀란다.
당연히 주은래가 옛날 이야기를 꺼낸 것은 모택동사상의 용어는 통속적이고 읽기 쉽지만 한번 두번 읽어서는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자신이 범했던 엄중한 과오를 진술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근원을 설명한다. 그것은 당시 젊은 나이에 높은 관직에 있었고, 관리노릇에 재미를 붙였고, 모스크바의 지시에 위배하면 관직을 잃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집행했던 것이라고 했다. 주은래는 이것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엄중한 교훈이라고 말한다.
주은래의 이번 발언은 표면적으로 두 가지 정보를 드러낸다:
첫째, 그의 당내지위는 예전에 모택동보다 높았다; 그와 모택동간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둘째, 당시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더욱 놀랍게 한 말은 "관리가 되고" "관리에 재미를 붙이고"등의 말을 썼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단어는 신중국건립후에는 구사회의 관료들을 비판하고 타도하기 위해 쓰는 말이었다. 즉, 적에게 붙이는 단어였는데, 주은래는 공산당이 간부에게 그것을 붙인 것이다. 이런 금기는 중국에서 1979년에 타파된다. 그때, <광명일보>에 발표된 글은 <장관(長官)의 의지에 따라 경제를 지배해서는 안된다>였다. 이는 온 나라를 뒤흔들었는데, 뒤흔든 것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제목에 "관(官)"이라는 말을 썼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공산당의 간부도 "관"이라 칭하는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래 경제규칙을 설명하는 글이 전국에서 정신해방의 작용을 하게 된다. 그후, 백성들은 "관"으로 공산당을 형용했고, 마음 속의 불만을 표시하며 유행어가 된다. 지금 대륙인들이 "관"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에도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상이 될 것이다. 1970년에 주은래가 이 단어를 쓰면스 자아비판을 했을 때, 참석자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표면적으로 보면, 주은래가 심하게 자책하는 것이지만,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중앙위원이고, 관료사회에서 오래 구른 사람들이다. 머리가 어찌 그렇게 단순하겠는가? 주은래가 남긴 사람들은 모두 실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공농병위원들은 그가 남겨서 참가하도록 하지 않았다.
몇년 후,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모 군구의 지휘관은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당시 아주 놀랐다. 첫째, 처음 이 역사를 알아서 놀랐고, 둘째,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모택동과 주은래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것같았다. 다만 당시에는 너무 많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을 너무 많이 생각하다가 만의 하나 부주의하게 입밖에 내면 골치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에 이르러, 강청은 명백하게 주총리에게 총구를 겨냥했고, 나는 여산회의에서의 보고에 대해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주은래는 모택동이 자신을 타도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같다."
이것이 바로 주은래가 소위 엄격한 자아비판을 한 진정한 의도이다.
그가 재삼 강조한 것은 모택동의 말은 한번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회의참석자들에게 이번 여산회의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암시한 것이다. 주은래는 모택동이 강청과 장춘교(張春橋)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리고 군대내의 불만을 다독이기 위하여, 부득이 임표를 희생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주은래와 모택동의 사이에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이제는 그가 모택동과 직접 싸워야 하는 것이다.
주은래는 보고를 마친 후, 원고를 여산자료관에 보내 보존시킨다. 그리고 단지 일반기밀문건으로 보존한다. 즉, 이 보고서가 외부로 흘러나가도록 허락한 것이다.
유사한 연기를 주은래는 여러 번 했다. 준의회의에서도 그는 마찬가지로 자아비판의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한다.
박고(博古), 소련고문 이덕(李德)과 모택동, 팽덕회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복고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았다. 그때 주은래가 일어나 발언한다. "군사상의 실패는 군사부장인 내가 주요책임을 저야 한다. 당중앙에서 저의 군사부장 직무를 면직시켜주기 바란다." 주은래의 이런 연기로 박고는 뒤를 받쳐줄 배경을 잃게 된다. 그러나 주은래는 오히려 칭송받는다. 결국 박고는 어쩔 수 없이 권한을 내놓게 된다. 박고는 권한을 내놓자 그것으로 끝장이었지만, 주은래는 여전히 당중앙핵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당시 임표가 병력을 파견하여 준의회의장을 포위하고 있었다. 결과를 내놓지 않으면 회의를 끝낼 수 없다고 말했다. 결과를 내놓으라는 것은 결국 모택동의 최고군사지휘권을 회복시키라는 것이다. 주은래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결국 키를 돌린 것이다.
겸손한 군자의 이미지로 자신의 진정한 목적을 가리는 것은 주은래의 뛰어난 수완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은래가 비도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근본이익에 해가 되지 않는 상황하에서, 그는 진심으로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익이 관련되면, 도덕은 그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그는 아주 잘 활용했고, 연기도 성공적이었다. 살아있을 때, 거의 누구도 그것을 판별해내지 못했다.
주은래의 "인간미"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보자. 서안사변때, 주은래는 중공의 몇 가지 주장을 표시한다. 주은래는 말을 마친 후 외부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합의서를 꺼내 장학량과 함께 장개석으로 하여금 서명하도록 압박한다. 그리고 나서 바로 화제를 바꾸어 집안일을 얘기한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아이들로 향한다. 장개석은 이미 장경국과 연락을 하지 못한지 오래되었다고 말하며, 아들이 그립다고 말한다. 주은래는 짐짓 모르는체 하면서, 이 일은 우리가 소련과의 관계를 통하여 반드시 장교장을 대신하여 공자를 데려오겠다고 말한다.
협상의 관건적인 순간에 집안일을 얘기하고, 무의식중에 자식얘기를 한 것이 설마 우연한 일이었을까?
이건 분명 주은래가 정교하게 기획한 결과이다. 장개석조차도 당시에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그 화제를 받아 얘기를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합의서는 바로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인간미가 충만하고, 실제로는 위협적인 분위기하에서 체결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은래이다. 그는 우세한 지위에 처해 있더라도, 사약을 내릴 때 사탕에 싸서 주는 것이다.
주은래의 또 한 가지 이미지는 "철면무사(鐵面無私)"이다. 중공에서 가장 즐겨 선전하는 것은 주은래의 청렴결백이고,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력으로 재물을 도모하거나, 부정부패하는 관리와 비교하면, 주은래는 확실히 청렴했다. 우리는 그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은래의 사심이 재물이나 친구를 도우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그에게 사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사심은 권력욕에서 나타난다. 오로지 자신의 지위만 중요하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은 도외시되는 것이다.
총리의 직책을 내팽개치게 되면 그 피해는 탐관오리의 것보다 훨씬 크다. 만일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고 하여 좋은 관리라고 칭송해야 한다면, "사인방"중 장춘교는 청렴결백한 정도가 절대로 주은래에 못지 않다. 그런데 중공은 왜 그를 감옥에 쳐넣었는가?
확실히 중공은 이 방면에서 이중기준을 가지고 있다. 먼저 그가 누구의 사람인지부터 따진다. 그 다음으로 그의 품성문제를 따진다.
주은래가 어떤 때는 철면무사로 그의 냉혹무정, 인간미가 없음을 가린다.
예를 들어, 본문의 첫머리에 언급한 손유세사건이 그러하다. 주은래의 이유는 이러하다: "당조직이 이미 자료를 장악했고, 그녀가 소련과 결탁했다고 인정했다. 나는 당원으로서 반드시 조직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그녀가 나의 양녀라는 이유로 그녀를 보호해줄 수는 없었다."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그는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모택동, 강청이 손유세를 돌파구로 삼아, 그가 소련과 여전히 결탁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으려 했다는 것을. 주은래는 자신은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손유세를 체포하는데 동의하였던 것이다.
같은 류의 연기를 주은래는 무수히 해왔다.
"장정"을 막 시작했을 때, 홍군은 인쇄기를 해체해서 가지고 갔다. 그러나, 굳이 이미 권세를 잃고,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구추백만은 남겨둔다. 이건 그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나 다음없다. 구추백에게 남으라고 통지한 사람은 주은래이다. 그는 당중앙의 결정이라고 그에게 통지한다. 구추백을 희생시킨 것은 주은래에 있어서, 그가 혁명을 이끌면서 저지른 여러 차례의 실수를 증명할 중요증인을 없애는 것이었다.
구추백이 국민당 감옥에서 쓴 <다여적화(多餘的話)>에는 주은래나 공산당원에 대해 단 반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정한 후도(厚道)이다.
"장정"의 대오에서 버려진 사람으로는 주은래의 가까운 친구인 진의(陳毅)도 있었다. 진의는 진방헌(秦邦憲)과 소련고문에게 미움을 샀다. 주은래는 친구를 위해 단 한 마디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장정"의 노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출발전에 그들은 만명이상의 믿을 수 없다고 의심되는 병사와 하급군관을 살해했다. 이것이 바로 국내외에 유명한 "만인갱(萬人坑)"사건이다. 주은래는 당시 주요지도자중 한명이었다.
이해관계가 걸리면, 도의는 따지지 않는다. 친구도 버리고 희생시킨다. 이것이 주은래의 일관된 표현이다. 그는 뼛속부터 극도로 이기적이고 유약하면서 권력을 탐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문혁때는 유소기, 하룡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도 여러가지 소위 "압력을 버티며, 피해자를 보호한" 이야기가 있다. 다만 그중 그 어느 것 하나도 그의 권력과 지위를 흔들만한 경우는 없다. 반대로 그가 더욱 인심을 얻고, 모택동과의 힘겨루기에서 카드 하나는 보태는 경우들인 것이다.
周恩来的伪善之谜 * 阿波罗新闻网
周恩来的伪善之谜
周恩来确实是个大谜团。毛活着时无人敢怀疑他,死后不久,那神灵般的光环即消退,连普通百姓也认清了他的真面目而周在世时,民众自以为了解他,可是随着他离世的年份愈长,引人怀疑之处就愈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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