專欄 | 엣세이/想知道什么---百科篇

중국은 "근(斤)"을 3천년간 사용했는데, 어떻게 국제기준도입후 500그램이 되었을까?

琢言 - 내 블로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6. 1. 23.
반응형

중국은 "근(斤)"을 3천년간 사용했는데, 어떻게 국제기준도입후 500그램이 되었을까?

글: 연연(姸姸)
야채를 살 때 무게를 재면 습관적으로 "1근 주세요"라고 한다. 이 "근"은 이미 사용해온지 3천년이 되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을 때, 1근은 250그램이었다. 그러나 명청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600그램에 가까워졌다. 각 왕조마다 근의 무게는 서로 달랐던 것이다.
1959년 국가에서 계량제도를 개혁했고, 돌연 "1근"을 500그램으로 정했다. 그리고, "열여섯량(十六兩)"을 "열냥(十兩)"으로 바꾸었다.
이 숫자는 그냥 보기에는 갖다 맞춘 것같은데, 정말로 우연이 그렇게 일치했단 말인가?
1) 전국시대, 각국의 도량형(度量衡)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같은 1근의 양식이 제나라와 초나라는 배나 차이가 났다.
상앙(商鞅)이 진나라에서 변법을 추진할 때, 직접 구리로 만든 양기(量器)를 제작한다. 역사에서 "상앙방승(商鞅方升)"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것은 별 볼일 없어보이지만, 진나라가 도량형을 통일하는 표준이 된다.
기원전221년, 진시황은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다. 그리고나서 처음 한 일이 "도량형통일"이었다.
그는 "상앙방승"의 표준을 전국에 보급하고, 각지방에서는 반드시 이 표준에 따라 양기와 저울(秤杆)을 제작하도록 명령한다.
그때의 1근의 실제중량은 개략 250그램이었고, 현재의 반근과 별 차이가 없었다.
진나라에서 한나라까지의 기간동안 1근의 중량은 개략 250그램을 유지한다. 백성들이 물건을 사고팔 때 사용한 것은 바로 이 표준이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는데, 무게기준이 나중에 갈수록 커졌다는 것이다.
수당시기에 이르러, 1근의 중량이 급증하여 직접 600그램가량으로 올라간다.
이건 어떤 황제가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다. 그냥 왕조교체, 기술진보, 지역습관등 여러가지 요소가 합쳐진 결과이다.
명청 두 왕조때, 조정은 특별히 "고평근(庫平斤)"을 관방표준으로 삼았고, 중량은 596그램가량으로 안정되었다.
이 표준은 주로 세수징수와 관방거래에 사용되었고, 백성들의 일상거래에서는 여전히 각양각색의 계산방법이 있었다.
산동에서는 1근이 아마도 580그램이었고, 강남의 1근은 610그램이었다. 같은 성 안에서도 서로 다른 현에서는 '석(石)'의 차이가 수십근에 이르렀다.
지방관청이 단속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시대에는 정밀한 검사설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간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상인들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사적으로 저울을 고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정상적이라면 16량의 저울을 써야 하지만, 어떤 사람은 몰래 "13량의 저울"이나 "15량의 저울"을 만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1근의 물건을 주는 것이지만, 실제는 몇량을 적게 주는 것이다.
관청에서 적발하면 중벌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리스크를 안고 돈을 벌려는 행위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청나라말기 서방의 '그램' '킬로그램'의 개념이 들어오고, 시중에서는 파운드, 온스같은 서양의 표준도 사용되었다. 중약(中藥)은 별도의 계량단위가 있어서, 도량형의 혼란은 극도에 달한다.
2) "반근팔냥(半斤八兩)"이라는 성어가 있고, 현재의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다. 그 말은 두 사람이 서로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는 바로 고대의 "열여섯냥제도"와 관련이 있다.
진시황이 도량형을 통일할 때, 이사(李斯)에게 합리적인 진법표준을 준비하라고 명령한다.
이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고, 북두칠성에 남두육성, 그리고 복록수 3성을 더하니 마침 16개의 별이었다. 그는 이 천상을 인간세계로 도입하여 1근을 열여섯냥으로 삼은 것이다.
이 제도는 2천여년간 사용되었다. 진한때부터 명청때까지, 역대왕조는 모두 열여섯냥제를 사용한다. 그 어느 황제도 이것을 바꾸지는 않았다.
백성들이 쌀을 사거나 밀가루를 살 때, 상인들이 거래를 하고 계산할 때, 모두 이 규칙에 따랐다.
1근은 16냥이다. 반근은 8냥이다. 양자는 완전히 일치한다. 이것이 바로 '반근팔냥'의 출처이다.
열여섯냥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당시의 계산습관과 관련이 있다.
고대인들은 주산을 사용했고, 십육진법이 십진법보다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1근의 물건을 넷으로 나누면 4량씩이 되고, 여덟으로 나누면 2량씩이 되어, 어떻게 나누어도 정수가 된다.
이런 편리성은 열여섯냥제가 오랫동안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만들었고, 완전한 상업계산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무게를 재는 도구도 이 표준에 따라 만들어진다.
고대의 저울에는 16개의 각도가 새겨져 있고, 매 각도는 1냥을 가리킨다. 저울추를 밖으로 움직이면 중량이 증가하고, 안으로 움직이면 중량이 줄어든다.
저울을 만드는 장인의 기술도 수십대 전해지면서, 새기는 모든 각도는 정확해야 한다. 차이가 나면 거래의 공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저울은 단순한 무게를 재는 도구만이 아니라, 고대 상업문명의 중요한 플랫폼이었다. '동수무기(童叟無欺, 어린아이이건 노인이건 속이지 않는다)'의 상업윤리가 되었다.
3) 1929년 중화민국정부는 국내도량형의 혼란상황을 보고, 이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해에 <도량형법>을 반포하여, 1시근(市斤)은 500그램이라고 명확히 규정한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근(斤)'과 '그램'을 연결시킨 것이다.
이 표준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과학적이었다. 국제통용의 미터법단위를 고려하면서, 중국인의 사용습관도 고려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500그램은 마침 0.5킬로그램이다. 환산하기에도 매우 편리하다.
중화민국정부의 아이디어는 매우 좋았지만 추진하는데는 곤란이 많았다.
그때는 군벌혼전상황이고, 각 지방은 각자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중앙정부의 명령이 하층지방정부까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동북의 장작림(張作霖)은 자신의 표준을 만든다. 양광(兩廣)의 진제당(陳濟棠)도 중앙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사천의 각로군벌들은 더더욱 각자 다르게 정한다.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16량저울이다. 누구도 돈을 들여 새로운 저울을 사고자 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더더욱 바꾸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옛날 저울에 익숙해 있었고, 신제도로 바꾸면 다시 계산방법을 공부해야 하고, 물건이 드나들 때 장부를 모조리 새로 계산해서 기록해야 한다.
여러 지역에 걸쳐 사업을 하는 상인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서로 다른 환산표준을 써야하니 골치아프기 그지없었다.
약방에서의 중의(中醫)들도 죽어라 바꾸지 않았다.
중약의 배합은 수천년간 전해져 내려오는 것인데 ,모두 "16량"을 기준으로 계산되어 있다. 약방문에 황기(黃芪) 3전(錢), 당귀(當貴) 5전(錢)"이라고 쓰여 있는데, 돌연 10진법으로 바꾸게 되면, 이 약들은 어떻게 환산해야 한단 말인가. 약을 잘못 먹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중화민국정부는 중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잠정적으로 그들에게 옛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허락한다.
양행에서는 킬로그램제를 썼다. 그러나, 그들은 외국인과 거래할 때는 그렇게 했고, 중국인과 장사할 때는 여전히 옛날 저울을 썼다.
이 개혁이 20여년간 지속되었지만, 시종 진정으로 추진될 수는 없었다.
1949년이전에, 전국각지의 도량형은 여전히 각자 다른 상태였다.
북경성내에서는 아마도 누군가 신표준을 쓰지만, 성문을 나서면 다시 구표준의 천하이다.
농촌의 전통시장에서는 16량의 저울이 여전히 주인공이고, 그램, 킬로그램이라는 말은 농민들이 거의 들어보지도 못했다.
4. 신중국의 철저한 개혁
1959년 6월 25일, 국무원은 <계량제도를 통일하는데 관한 명령>을 반포한다.
이 명령에서 명확히 규정한다: 국제미터법제를 국가기본계량제도로 한다. 시중의 10냥을 1근으로 하고, 1근은 500그램으로 한다.
중화민국시기와 달리, 신중국은 강력한 조직력과 동원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번 개혁은 정말 시행이 되게 된다.
전국각지에서 신속히 움직였다. 정부는 기술자를 조직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저울을 바꾸어주었다.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16량'저울은 모두 회수하고, 새로운 '10냥'저울로 바꾸어주었다. 상점, 양곡점, 공소사(供銷社), 모든 무게를 재는 곳은 설비를 바꾸었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저울추, 저울은 모두 새로운 표준에 맞추어 제조되었고, 시장에는 더 이상 16냥짜리 저울의 그림자를 볼 수 없게 된다.
개혁과정에서, 정부는 특별히 중의업계를 고려해준다.
중약배하븐 정확해야 하고, 일전일푼(一錢一分)도 틀려서는 안된다. 16량제를 천년이상 사용해 왔으니, 고치는 것에는 리스크가 아주 컸다.
국가는 중의업계는 계속하여 옛날 표준을 쓰도록 잠정 허락한다. 1979년에 이르러 비로소 새 표준으로 완전히 고치게 된다.
이 20년간, 약방에는 동시에 두 개의 저울이 있었다. 중약을 팔 때는 구저울을 쓰고, 다른 것을 팔 때는 새저울을 썼다. 약제사는 두 표준을 모두 익숙하게 익혀야 했다.
500그램이라는 숫자로 확정한 것은 정밀하게 계산한 것이었다.
산업화건설에는 국제적인 기준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미터법제도는 세계의 통용규정이다.
1킬로그램을 2근으로 하면 환산하기 편하다; 500그램을 1근으로 하면 백성들이 기억하기도 쉽다.
이 표준은 공업생산의 정확한 요구에 부합하면서, 중국인의 사용습관도 보류한 것이다. 과학성과 실용성을 완벽하게 결합시켰다.
1994년, 국가는 전통저울을 거래에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고, 전자저울의 사용을 보급했다.
전자거울은 모니터에 그램수와 근수가 표시된다. 젊은이들은 그램을 보고, 나이든 사람은 근을 보면 된다.
지금 채소시장에 가면, 상인들은 1근에 얼마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자저울에는 500그램으로 표시된다. 두 개념은 이미 하나로 통합되었다.
'근'이라는 글자는 진나라의 250그램에서, 명청의 600그램, 그리고 최종적으로 500그램으로 정해진다. 이는 중화문명 3천년의 발전역사를 보여준다.
결국 500그램이라는 이 표준은 우연이 아니고, 임의로 결정한 것도 아니다. 역사변천의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지금 대륙에서는 통일적으로 500그램을 쓰고, 대만에서는 여전히 600그램의 대근(臺斤)을 쓰며, 홍콩에서는 605그램의 사마근(司馬斤)을 쓴다. 쿤밍(昆明)의 일부 지방에서는 근(斤)이 킬로그램(즉, 1000그램)을 가리킨다.
똑같이 '근'이라고 말하지만, 서로 다른 지방에서는 중량이 배까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면 자세히 물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할 수 있다.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