專欄 | 엣세이/想问的因生---哲學篇

핫리뷰 [다시읽기] ㅣ 김성수,채만식,이광수,조만식,안재홍의 친일 문장들

琢言 - 내 블로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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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리뷰 [다시읽기] ㅣ 김성수,채만식,이광수,조만식,안재홍의 친일 문장들

조선인이 임진왜란 때 무기를 잡아보고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저 얄궂은 감회는, 임진왜란 때 무력을 행사한 상대가 바로 왜적이었다는 기억마저도 떠올릴 틈이 없었던 다급한 논리 개발이었음을 실토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황국을 위한 무(武)를 동원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끌어대는 저 거친 주장의 배경과 환경들을 면밀히 분석해서, 강압 속에 이뤄졌을 친일의 무게를 좀 가볍게 해주는 게 바람직할까.

 

더뷰스 : 친일, 우리가 곰곰이 읽어봐야할 그 글들 

 

스무살에서 백살로 바뀐 지금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살이에서 해방된지 80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강렬한 의미를 발산하는 친일(親日) 논란은 어떤 의미일까.

해방되던 해에 스무살이던 사람이 100세가 된 시점에서 강점기 당시 일제에 협력했던 인사를 찾아내고 그들을 기록해두고자 하는 의욕은 옳은 것일까.

그 의욕 속에는, 친일행위로 얻었을 수도 있는 프리미엄을 지닌 채 해방 이후에도 권력과 재력을 키워온 당사자들과 그 후손들에 대해, 최소한 수혜만큼의 타격을 주는 게 마땅하다는 산술적 정의감이 끼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산술적 정의의 실현

이 산술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가치관과 사회정의가 헝클어졌다는 인식이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친일 부역(附逆)에 대한 단죄론은 주로 역사의 과오가 규명되고 정리되지 않은 채 묻혀짐으로써, 같은 역사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있다는 논리에서 나오기도 한다. 과연 그런지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친일 행위는 왜 발생했는가. 식민 환경 속에서 이익을 누리거나, 혹은 최소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는 욕망이, 억압받는 민족을 더욱 억누르거나 외면하고, 강자에게 빌붙는 행위로 이어졌을 것이다.

 

일제 강점 자체가 근본원인

환경을 좀 더 넓게 잡는다면, 일제의 강점 자체가 친일을 낳은 핵심 원인이다. 이웃 나라를 정신적으로 병탄하려는 일본의 각종 프로그램들이 '영향력있는 조선 인사'의 친일 전향에 맞춰졌을 것이다.

이런 전향과 함께, 전향의 특혜들을 의식한 적극적 친일 또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말없이 당하고만 있던 힘없는 사람들은 이런 태도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을 것이며, 해방이 된다면 저 사람들부터 처단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해방은 식민사회의 계급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사회를 구성했다. 이른 바 친일인사들은 빠르게 전신(轉身)하여 지난 과오를 감추거나 축소하면서, 해방된 사회의 재구성에 뛰어들었다. 그 정리되지 않은 역사가, 8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채기와 통증을 드러내는 셈이다.

죄의 크기를 어떻게 잴 것인가

친일 인사의 문제는 우선 그 징벌부터 논란거리다. 과오를 찾아내서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그렇게 죄의 크기를 잰 뒤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도 문제다.

우선 친일이 바탕이 되었을 수 있는 권력과 재산을 현재 누리고 있는 후손들의 '프리미엄'을 뒤늦게 박탈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손쉬운 방법이 '이름을 사형시키는 방식'의 명단공개인데, 이 방법의 문제는 친일의 정도나 방식을 엄격히 구별하는 이성적인 잣대의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친일 인사로 기록되면 적극적 친일이나 소극적 친일이나, 일제의 강압에 굴복한 친일 등등이 모두 한 가지로 매도된다. 기록은 하되 처벌은 없는 만델라식 과거해법의 도입이 권유되기도 했지만, 우린 기록보다도 '공개 거명'을 통한 심리적 징벌에 더 힘을 기울이는 듯한 인상이다.

공개 거명을 통한 심리적 징벌

친일 문제는 식민 지배의 역사로 상처받은 이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은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엄격히 생각하면, 친일은 환경에 적응하거나 굴복한 행적일 뿐이다. 

더 심각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부른 국가적 무기력과 민족 전체의 자기 경신(更新)의 부족이 아닐까 한다.

이미 빼앗긴 나라 안에서 폭압적인 강자에게 얼마나 협력했느냐의 정도를 따지는 일로써, 애국심 경쟁을 벌이는 일은, 소모적이고 자해적인 행위일 수 있다.

국가가 무너진 과거에 대한 한풀이

친일 문제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국가 정체성이 붕괴된 과거에 대한 한풀이의 낌새가 있다. 친일 문제는 과거사 속의 뒤틀린 정의들을 바로잡는 일일 뿐이다.

그 뒤틀림 중에서 외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뒤튼 것들을 골라내서 응징할 수 있을 뿐이다.

친일 문제에 대한 흥분의 정도를 애국심의 사이즈와 연결짓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 변함없다. 흥분하지 않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구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들을 모아서, 문제 자체를 알고 있지 못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증거가 뚜렷할 수 밖에 없는 '글쟁이들의 친일'

글들을 중심으로 친일 행적을 따지는 일의 위험은, 문필가나 언론인 등의 친일만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친일 인사의 명단 속에 유명한 글쟁이들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글로 남아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를 교훈적으로 해석하면, 글을 섣불리 쓰는 일을 경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처럼 글밭 한켠에서 밥먹고 사는 자들이, 백성을 배신하고 권력에 기생한 결과가 어떻게 남는 것인지를 웅변하는 교과서일 수 있다.

'친일'을 아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친일의 여러 가지 사연과 맥락들을 좀 더 섬세하게 파악함으로써, 역사적 관점의 잣대들을 알맞게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친일을 공부하자! 어떻게 친일했는지를 공부함으로써, 인간의 약점과 어리석음, 그리고 상황이 인간을 강제하고 변모시킨 사례의 경계로 삼는 일은 여전히 유효하다.

 

# 김성수의 친일

나는 우리가 황민화를 고창하여 온 이래 제군이 자조 자신의 황민으로서의 권리를 일반사회에 대하야 요구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일본은 3천년이라는 오랫 동안 금일의 제국의 영광을 빗내는데 온갓 의무를 수행하여 왓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30년 밖에 안된다.

30년과 3천년의 차를 가지고 권리에 잇서서 평등을 요구할 수 잇슬까. 이것은 제군이 권리 만을 주장하는 서양의 학술에 현혹된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크다' 김성수 '매일신보' 1943 11 6일자

 김성수는 "우리는 대동아 건설의 1분자는 그만두고 황민으로서 훌륭히 제국의 1분자가 될 수"있다고 주장한다.

두 민족을 통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 민족에게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왜 주지 않느냐는 불만을 가진 이 땅의 사람들에게 그는, 저렇게 설득하려 하고 있다.

우리가 '황민화'가 된 것은 30년인데, 일본은 3천년이라고 비교한다. 즉 일본 식민지가 됨으로써 우린 '천황의 백성'이 되었고, 일본은 전역사를 통틀어 천황의 백성이니 같은 대우를 해달라고 하는 게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민족 통합과 민족 차별의 모순을 교묘히 가린 저 논지는, 일제가 발명하고 싶은 논리를 이 나라 지식인이 앞서서 해준 사례라 할 만하다.

 

# 채만식의 친일

나라는 백성의 모체다. 나라 있고서의 백성이다. 세상엔 나라없는 백성이 노상 없음은 아니다. 그런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국기(國旗)의 배경 없는 백성은 천하의 천민이다. 백성은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다....

전쟁은 국난이다. 국난은 백성이 나서서 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 되어 최대의 의무요 아울러 최고의 영광은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즉 전쟁에 나아가 한 목숨이 죽을 수 있는 군인될 자격을 가지는 것이다.

반대로 만일 그 백성이 나라가 방금 국운을 내어걸고 전쟁을 하는 날에 전쟁에 피를 흘림으로써 나라의 방패가 되지 못하는 자라고 한다면 그는 나라에 대하여 한낱 불구자적인 기생충적인 부끄러운 존재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충의의 극치는 거듭 말하거니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데 있다. 나라에 충()하지 못하는 백성이야 무엇으로 백성 값에 갈 것인고.

 

'홍대하옵신 성은' 채만식 - 매일신보 1943 83일자

 이 작가가 내세운 주장은 '백성된 자로서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 가장 충의로운 일'이라는 논리다.

그는 왜 이런 논리를 말하고 있을까. 일제의 침략전쟁이 점점 가열되던 1943, 조선인 징병의 필요성이 한층 더 커졌다. 문제는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나가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이 일본의 전쟁에 왜 나가 죽어야 하느냐는 불만이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지식인들이 대대적으로 자발적 군입대를 독려하고 나선다. 채만식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백성'이라는 말 속에 녹여버린다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 피를 흘리는 것이 백성의 의무이자 영광이라고 주장한다. 징집에 대한 저항의 원인을 슬쩍 가려버리고, 국가와 충성의 논리를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시책을 긍정적으로 선전한다.

논리가 군색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한 까닭인지, '불구자적인' '기생충적인' 따위의 극언을 사용하여 징집 기피의 죄책감을 조작해내려 하고 있다.

채만식이 격문과 같은 선동의 글을 쓴 것은, 일제의 억압에 굴복한 결과라 볼 수도 있겠지만, 일제라는 강자의 환경이 오랫 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민족적 절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희망을 포기한 지식인의 뇌리에는, 달변의 꾀를 통해 독자를 속아넘어가게 하려는 전략 이외에는 없다. 자기가 하는 말이 억압받는 겨레에 대한 치명적인 배신이며 오랫 동안 남을 역사적 해악이라는 사실은 이미 염두에 두지 않은 글이다.

 

# 이광수의 친일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 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유일로가 있다고.

그러므로 조선인 문인 내지 문화인의 심적 신체제의 목적은 첫째로 자기를 일본화하고 둘째로는 조선인 전부를 일본화하는 일에 전 심력을 바치고 셋째로는 일본의 문화를 앙양하고 세계에 발양하는 문화전선의 병사가 됨에 있다.

조선문화의 장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리하기 위하여 조선인은 그 민족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할 것이다. 이 발전적 해소를 가리켜서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 - 이광수, 매일신보, 1940 9 4일자

 당시 최고의 거물급 지식인이었던 춘원의 이같은 견해는 조선인 사회의 '친일 경향'의 한 가이드라인이 되었을 것이다.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 '버려야' 한다는 주장은, 일본의 혀끝에 춤추는 '오버'를 지나, 광기와 같은 확신을 드러낸다.

자신의 확신을 의제로 만들기 위해 그는 '심적 신체제'라는 희한한 말을 만들어 쓴다. 요즘 말로 하면 '마음의 새로운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을 확산시키는 방법은 광신종교의 전도와 닮아있다. 자기가 우선 '일본인'이 되고, 그 다음엔 조선인 전부에 전도하고, 그 다음엔 세계를 일본 문화로 만들자는 엄청난 프로그램을 말한다.

'조선인은 민족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일본인들의 주장보다도 과격하다. 이 태도는 친일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 지식인의 정체성 없는 내면의 고백이기도 하다.

환경 변화에 따라 다른 신념들을 쉽게 가질 수 있으면서도 그것에 저토록 강렬한 확신을 쏟아부어 다른 사람을 현혹하는 글쓰기를 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겐 없는 태도일까.

 

# 조만식의 친일

생을 받은 사람은 한번은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이러한 생명을 국가비상지추(非常之秋)에 반도를 위하여, 황국(皇國,일본)을 위하여 또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하여 바치게 된 제군은 얼마나 광영스러운가.

 

조만식, '매일신보' 1943 11 16일자

■ 일제에 저항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조만식 선생의 저 기고문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광포해진 침략자 권력의 강요에 의해, 죽지못해 씌어졌을 지도 모르는 저 글은, 한 애국적 생의 중요한 오점으로 남았다.

이광수의 '내지-조선의 한몸론'이나 김성수의 '1분자론'이나 채만식의 기생충론처럼 열변을 토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조선인의 일본군 입대를 독려하는 글임에는 틀림없다.

작은 훼절과 대담한 '몸팔기'가 지식인들 사이를 징후처럼 퍼져가는 1943년의 굴종과 지적 창녀 경쟁이, 두렵고도 아프게 다가온다.

 

# 안재홍의 친일

돌이켜 생각하여본 즉 반도인이 과거에 있어서 무기를 손에 잡아보기는 거금 수백년전 임진전역 때이고 그 후 오늘이 처음이다. 지금 우리가 대동아 성전을 계기로 이 위대한 역사적 무대에 황국(皇國,일본)신민(신하 백성)의 일분자로 스스로 총검을 들고 나서게 된 것은 실로 감개무량한 바 있다.

 

안재홍 - '매일신보' 1943 11 5일자

 오로지 무()의 논리를 찾아내기 위해 골몰하던 나머지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도 잊어버린 희한한 글이다.

조선인이 임진왜란 때 무기를 잡아보고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저 얄궂은 감회는, 임진왜란 때 무력을 행사한 상대가 바로 왜적이었다는 기억마저도 떠올릴 틈이 없었던 다급한 논리 개발이었음을 실토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황국을 위한 무()를 동원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끌어대는 저 거친 주장의 배경과 환경들을 면밀히 분석해서, 강압 속에 이뤄졌을 친일의 무게를 좀 가볍게 해주는 게 바람직할까. 다른 글들과 연계해서 좀더 치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혹여, 그 지적인 부역 속에서도, 임진왜란을 상기시키는 저 엉터리 논리를 내놓은 건, 안재홍이 슬쩍 저들의 광기를 비웃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보기에는 사안이 너무 심각하고, 황국신민의 일분자가 느끼는 감개무량이 너무 적극적이다. 물론 이 기록의 맥락들은 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글들을 모아놓고, 대놓고 욕하자고 혹은 침뱉자고, 이렇게 정리해놓은 건 아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오래되었지만 의미있는 실상을 곰곰이 읽는 일은 역사와 현재의 분별을 돋우는 일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ㅣ 더뷰스 역사리뷰 isomis@naver.com

핫리뷰 [다시읽기] ㅣ 김성수,채만식,이광수,조만식,안재홍의 친일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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