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왜 '종군위안부 증언' 영화를 찍었나
"가건물에 칸막이가 지어진 한 평 남짓한 방에는 침대라야 이름 뿐인 나무판자에 담요 한 장을 깐 그 위에 드러누워 하루에도 수백명의 사내를 접대하니, 영락 그것은 시체와도 같은 것이었지만..." 유인호 교수가 남양 전쟁 군인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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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아사히신문에 실린 글
1979년 6월7일 일본 아사히신문 문화란에 ‘종군위안부의 눈물’이란 글이 실렸다. 필자는 야마따니 데쯔오(山谷哲夫)라는 일본인이었다.
그의 글에는 ‘고국 조선의 추억에 울음을 터뜨린 하루모니(할머니)’라는 제목의 사진이 함께 게재되어 있었다. 야마따니 데쯔오는 조선인 종군위안부 기록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 글을 우선 읽어보자.
종군위안부의 눈물
(야마따니 데쯔오의 칼럼)
금년의 5월에야 겨우 '오끼나와의 하루모니-증언 종군위안부'라는 한 시간26분의 기록영화를 3년 걸려 완성시켰다. 하루모니란 한국말로는 할머니라는 뜻이다. 종군위안부라고 하더라도 전후에 태어난 독자들에게는 처음으로 듣는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되므로 먼저 약간 설명해두기로 하겠다.
일본, 중국과의 확전으로 조선인위안부 동원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의 확대와 함께 중국여성에 대한 수많은 강간사건의 속출과 그것에 수반되는 성병의 만연으로 전선을 이탈하는 병사 때문에 골치를 앓던 일본군의 상층부가 군대 전용의 매춘부를 모아 그것을 관리하였다. 목적은 어디까지 병사들의 강간 방지와 성병 예방이었다.
육군에서 관리하고 매춘에 종사케 하고 있었던 여자들은 종군위안부라고 불리어지며 그 대부분은 조선인이었다. 소수의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지만 그들의 태반은 공창(公娼:허가를 얻어 매음하는 곳) 출신으로서 성병 경험자가 많았다.
그때문에 군부는 이들 일본인 위안부보다 오히려 젊고 건강하고 성병과는 인연이 없는 조선인 위안부를 환영하였다. (이른바 여자 정신대-인용자)
총독부도 일본군부도 숨긴 '조선인 여성 연행' 자료
일설에는 20만명 또는 7만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 여성이 패전에 이르기까지 중국이나 동남아 그리고 오끼나와 등의 일본군 진지에 거의 강제적으로 연행되었다. 그 대부분이 가난한 집의 처녀들이었다. 그러한 여자들의 사정을 지금 조사하려 하더라도 거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내보낸 조선총독부는 패전 직후에 책임 추궁을 두려워하여 증거서류를 전부 처분해버렸으며, 받아들인 일본의 군부에서는 위안부의 존재를 감추기만 하고 있었다. 성전(性戰)이 아닌 성전(聖戰)을 완수하고 있는 '황(皇)군'이 매춘부를 끼고 전쟁터를 옮기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에도 공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오직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몇 만, 몇 십만이라는 조선인 여성들이 억지로 가족과 애인으로부터 헤어지고, 일본의 패전에 의하여 조국이 해방된 후에도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몇 만, 몇 십만 조선인 여성, 일본 패전후 고향 못돌아가
위안부의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과로, 성병 그리고 불길에 휘말려 죽고 말았다. 소수의 살아남은 위안부들도 노령화하고 있다.
과거가 부끄러워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등 이국의 땅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갈 것이다. 모처럼의 생존자도 가족에 끼칠 괴로움을 생각하여 앞으로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말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불과 10년도 못되어 종군위안부의 역사적 사실은 그 사람들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잊혀지고 말 것은 확실하다.

야마따니 "곧 사라질 '위안부' 진실, 누군가는 기록해야"
그렇다면 '어머니'를 부르면서 망향의 슬픔을 안은 채 전쟁터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지는 무수한 종군위안부의 넋을 거둘 수 없다. 누군가가,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서 이와 같은 운명을 밟게된 여자들의 역사를 기록에 남겨두지 않으면 안된다.
우연히 일본군을 좇아 강물을 건너는 종군위안부의 한 장의 사진을 1977년에 보고 비로소 그 존재를 알고 충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그녀들의 기록영화를 만들고자 결심하였다.
그래서 1977년 7월과 1978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으로 취재하러 갔다. 전후 한달 가까이 살아남은 위안부를 찾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나 결국은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약간의 실마리는커녕 오히려 한국의 사람들로부터 '지난날의 잊고싶은 것을 캐내기보다는 왜 당신의 아버지에게 그것(위안부에 관한 것)을 묻지 않은가'라는 반문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장인은 중국전선에 장교로서 근무하였지만 아직까지도 위안부에 관하여 스스로 말한 것이 없다.
1978년 오끼나와서 살아남은 조선인 위안부 취재
1978년 8월에 접어들어 오끼나와에 살아남은 64세가 되는 조선인 위안부가 있다는 얘기를 소문에서 듣고 곧바로 남쪽 섬으로 뛰었다. 남부의 농촌의 사탕수수밭에 둘러싸인 다다미 두 장 정도 넓이의 오두막집에, 한 달에 3만원 남짓한 생활보호비를 받고 할머니는 남몰래 혼자 살고 있었다.
나는 '나수'의 여관에서 사탕수수밭 오두막집에 왕래하였다. 8일째가 되던 날 드디어 지쳐버린 할머니가 입을 열어주었다. 1979년 1월에도 할머니의 얘기를 다시금 듣기 위하여 오끼나와로 갔었다. '오끼나와의 하루모니'라는 기록영화는 이 할머니의 얘기가 중심이 되어 있다.
하루에 몇 십명 노리개로 지내다, 오끼나와에 버려져
< 충청남도 소작인의 딸로 태어나 일곱살 때 먹고살 수 없어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고 그때부터 남의 집에서 일하며 살아왔다. 10세 때 사람들의 권유로 어떤 남자와 결혼하였으나 남자는 건달이라 그녀의 벌이만을 노릴 뿐 결국 그 남자와 헤어지고 고향에도 있을 수 없게 되어 조선반도를 식모살이로 떠돌았다.
그때 마침 곤도오라는 일본인에 속아 당시 특공대 기지가 있는 오끼나와 도가사끼 섬에 다른 여섯 명의 조선인 위안부와 함께 끌려왔다. 29세때의 일이었다.
아끼꼬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하루에 몇 십명 군인의 노리개로 지내다가 패전과 함께 오끼나와에 버려지고 말았다. 동료들은 도망을 가기도 하고 폭격으로 죽게 되기도 하였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엔 나 혼자뿐이었다. 그로부터 계속하여 미국 군인들이라든가 오끼나와 주민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살아남아왔다.>

야마따니 "버림받은 어머니와 할머니 생각났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배우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남자들의 노리개로 취급되어온 '하루모니'의 일대기를 촬영하면서 , 영세한 어부의 아내로서 그리고 딸로서 철저하게 남자의 운이 없었던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생각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중학교까지 다니던 도야마의 집에서는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여자들이 이따금 어머니를 찾아왔다. 유유상종이라고 할까. 편모 슬하의 외아들인 나는 사물을 판별할 나이 때부터 그러한 여자들의 신상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실은 그러한 여자들의 눈물을 보는 것이 싫어서 중학을 마치자 마자 어머니와 할머니의 곁에서 떠나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제까지 스스로의 그와 같은 과거를 회고하지 않으려 노력해왔으나 '오끼나와의 하루모니'의 촬영이 진행됨에 따라 도야마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에 다시금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면서 무엇 때문에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다는 것만으로서 사람들로부터 바보 취급되고 남자들에게 이용되기만 하는 가에 대해 혼자 분노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왜 울었나, 위안부 시절 때문 아니라 고향 얘기에...
이번의 종군위안부 영화제작을 완성함에 있어 결정적인 힘이 된것은, 민족적인 것을 떠나 가난에 대한 분노였다.
'오끼나와의 하루모니'의 라스트는 할머니의 눈물이다. 종군위안부 시절의 얘기는 오히려 어깨를 펴고 말해주었지만 옛날 조선에서 살던 얘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고 만다. 일곱살 때 체험한 풍비박산 얘기에 이르자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시종일관 버티던 할머니가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리고 만 것이다.
이 글을 한국에 소개한 사람은 兪仁浩(유인호, 1926-?) 교수다. 이 분은 일본 리스메이칸대학교(立命館大學校) 경제학부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동국대학교 교수 및 중앙대학교 정경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사장, 공해추방운동연합 고문, 한국협업농업연구소장을 지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경제학」「경제정책론」「경제정책원리」「민중경제론」「민중과 경제」「한국경제의 재평가」「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나의 경제학 : 수난과 영광」 옮긴책 틴버겐「경제정책의 이론」「현대경제학의 위기」가 있다.)
유인호 교수는 아사히 신문에 실린 ‘종군위안부의 눈물’을 번역해 1982년 출간된 유명한 책 ‘역사와 인간(변형윤-송건호 편, 도서출판 두레)’에 담았다. 유교수의 글은 ‘일제의 조선침략 사고-그 연속성과 미결의 장’이란 제목으로, 일제의 조선침략 사고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쌓여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1965년에 그들은 한국에 돌아올 자리를 뺏겼다"
이 논문 속의 세번째 챕터인 '미결의 장'에는 <여자 정신대-종군위안부 문제>가 실려 있다. 생생하고 충격적인 증언과 기록이 담겨 있는 글이다.
야마따니의 취재스토리를 인용한 뒤 유교수는 이렇게 고통스런 기분을 토로했다.
“참으로 처절한 민족수난사의 장면이다.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그 대부분이 종군위안부가 되었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고혼들은 자기의 얼굴도 보일 수 없고 기록도 없다. 한반도의 하늘 위를 흐느적거리며 앉을 곳을 찾으려 하나 그 자리는 1965년에 빼앗기고 없다. 여자 정신대-종군위안부의 진상을 기록에서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하여 시도되어야 한다.”
피해자도 감추고 가족도 감추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소
그는 또 이런 경험을 밝히기도 했다.
"얼마 전(1980년대 초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들러 자료를 빌리다가 "혹시 '여자 정신대'에 관한 자료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자료도 없거니와 그 문제만큼 알기 어려운 문제는 없을 거요. 원폭피해자의 경우만 하더라도 스스로를 감추려 하는데 하물며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거요. 피해자도 감추고 가족도 감추니 어떻게 알아낸단 말이오"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필자는 일본이 패망하자 바로 불태워버린 것이 '조선여자정신대' 20만명의 명단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으므로 그런 대답은 예상하였으나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혹시나'하여 물어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위안부 징발 바람에, 조선에 조혼(早婚) 성행
유인호 교수는, 그가 수집한 ‘종군위안부’ 관련 정보들 중에서 2가지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놓고 있다.
“그 첫째는 제2차 대전 중에 일본침략자에 의하여 이 땅의 아리따운 수많은 쳐녀들이 끌려갈 대 일어난 한 가지 사건, 즉 조혼(早婚)의 모습이다. '처녀공출'이라고 불리어진 여자 정신대에서 기혼여성은 제외된다고 하여(전쟁말기엔 유부녀도 동원된 증거가 있지만) 조혼이 성행하였다.
그런데 조혼은 두 가지 이유에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처녀공출을 피하기 위하여 16,17세의 어린 딸을 출가시키기 위한 어머니들의 동분서주이고, 또 한 가지는 조선인 노무자(주로 청장년들)의 징용, 육군 지원병, 해군 지원병 등 각종 명목으로 이 땅의 청년을 모조리 전쟁터로 끌고 가니 집집마다 아들을 빼앗기기 전에 손(孫)을 받아 대(代)라도 잇겠다는 목적에서 조혼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당시 어린 아이들에게 알려지기로는 "처녀들을 엮어모아 기름을 짜서 그것으로 전쟁물자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마 여자정신대가 종군위안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없어 지어낸 말일 것이다. 그러하니 딸을 가진 부모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스무살 안된 조선처녀들, 하루 수백명 사내 접대"
또 한가지 기억은(입에 담기도 어렵고 글로 쓴다는 것은 더 어렵지만 그러나 적어야만 되겠다고 생각한다) 제2차 대전 후 남양의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의 독백의 한 토막이다. 35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귀에서 사라지지 않는 구절이다.
"전쟁에 지친 사나이가 찾는 것은 여자인데 그 모두는 스무 살이 채 안되는 조선처녀들이었지. 가건물에 칸막이가 지어진 한 평 남짓한 방에는 침대라야 이름 뿐인 나무판자에 담요 한 장을 깐 그 위에 드러누워 하루에도 수백명의 사내를 접대하니, 영락 그것은 시체와도 같은 것이었지만 굶주린 사내들은 그대로 욕구를 채우지. 사내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 가지고 있는 돈은 모조리 침대 옆에서 입벌리고 있는 고리짝에 던지고 말지. 그런데 다음날 그 여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입을 벌린 고리짝은 돈을 담은 채 그대로 있으니, 아마 시체가 되어 나간지도 모르지. 불행한 여자들 참으로 죄없이 많이도 죽었지"라고 술회하는 것이었다.
죄없이 죽어간 그 많은 여성들의 숫자는 앞으로도 밝혀지지 못하고 말 것이다. 7만에서 20만 사이라고 한다.“
"14만 3천명이 군졸의 성노예로 죽었다"
유교수는 또 이 논문에서, 한백흥이란 분이 쓴 ‘실록 여자정신대, 그 진상(예술문화사, 1982년)의 머리말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일제는 피어나는 배달의 어린 딸들을 총칼로 위협하고 속임수로 꾀어 군졸의 성노(性奴)로 삼았다. 여자 정신대는 이국땅 움막에서 전선의 막사에서 또는 초소의 토치카에서 아니면 남국의 밀림에서 밤낮없이 짓밟히고 시달리다 쓰러져 갔다. 조국의 이름 한번 불러보지 못한 채 기아와 질병에 쓰러졌고 포격 속에 전멸되는 군대의 길동무되어 죽어줘야 했다. 아니면 피와 살을 깎아 바친 상전에게 기관총 세례를 받고 수류탄 처분을 받았다.
이렇게 죽어간 머릿수가 14만 3천명.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한민족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 뿐이다. 구사일생으로 해방된 고국땅을 밟은 여인은 환향녀로 동포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어둠의 골목으로 자취를 숨겨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40에 백발탈모, 생리의 중단, 갖가지 노쇠질환 속에 외롭고 치욕스런 어둠의 여생이 전부였다. 이제 그나마 살아있는 증인들이 가기 전에 비분을 풀어보고 그 진상을 남기고자 나름대로 사명감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고증하여 치욕의 정신대사(史)를 엮어보았다. 정신대를 모르고는 민족수난사를 말할 수 없다."
1965년 한일협정의 실상
시간은 역사의 악몽이나 그 속에서 일어난 끔찍한 만행과 비극을, 마치 바닷가에 밀려드는 밀물에 씻겨나가는 모래 밭처럼 쉽게 지우는 듯 하다. 유교수는 이런 현상을 “한반도의 하늘 위를 흐느적거리며 앉을 곳을 찾으려 하나 그 자리는 1965년에 빼앗기고 없다”고 개탄했다.
1965년은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이 체결된 해다.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피해 보상문제는 한일관계의 핵심 쟁점으로 남아있다.
일본 정부와 관련기업들은 이 협정(한일협정 제2조)으로 모든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은 총8억 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를 제공했다.
이를 이유로 개별보상은 한국정부의 몫이라고 주장해왔다. 즉 일본에 대한 개인청구권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은 자국 또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자이므로 상호 보상을 포기하자는 논리를 꺼냈다.
개인청구권의 문제는 노무현정부 때 ‘소멸되었다’고 해석했다가, 문재인 정부 때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8년)로 ‘여전히 존재한다’고 입장을 세운 바 있다.
이미 시체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종군위안부에 대한 문제는 바로 이 대목에서의 핵심쟁점이다. 일본이 ‘한일협정으로 해결 완료’라고 주장하는 것은, 피해자가 배제된 채 국가간 타협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협정 한계론’을 의식한 강변이다.
유인호 교수가 남양의 전쟁현장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들었다는 말이 잊히지 않는다. “(이미) 시체와도 같은 것이었지만 굶주린 사내들은 그대로 욕구를 채우지.” ㅣ 더뷰스 북리뷰 isomis@naver.com
일본인은 왜 '종군위안부 증언' 영화를 찍었나
일본인은 왜 '종군위안부 증언' 영화를 찍었나 - 더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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