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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즉생! 이순신, 청어를 팔아 군량과 무기를 마련하다

琢言 - 내 블로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6.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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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즉생! 이순신, 청어를 팔아 군량과 무기를 마련하다

글; 권경률 역사 작가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47)
〈난중일기〉에 흐르는 '칼의 노래'
피란민 먹고 살길 열어주고 ‘경제 용병술’로 재원 조달
삶에 드리운 애통한 죽음들을 결전의 원동력으로 삼아

이순신 종가에 전하는 한 쌍의 긴 칼. 칼날에 각각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떤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三尺誓天山河動色) /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네(一揮掃蕩血染山河)”(이순신 장검 검명(劍銘))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의 종가에는 국보로 지정된 한 쌍의 긴 칼이 전한다. 삼도수군통제사의 의장용 장검으로 칼날과 칼자루를 합쳐 길이가 2m에 육박하고 무게는 4㎏이 넘는다. 1594년 4월에 만든 이 두 자루의 칼에는 각각 검명이 새겨져 있다. 칼날의 명문은 이순신의 글씨라고 한다. 장군이 지은 ‘칼의 노래’다.
<칼의 노래>는 소설가 김훈이 2001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순신을 종래의 성웅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해 이미지를 재정립한 작품이다. 성스러운 영웅의 서늘한 갑옷 속에서 따뜻한 체온이 흐르는 인간미를 끄집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범속한 필자는 그 갑옷의 무게조차 감당하기가 버겁다.
국립중앙박물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2025년 11월 28일~2026년 3월 3일)은 바로 인간 이순신을 만나는 자리였다. 바다 위에서 고뇌하고 흔들리면서도 마음을 다스리며 묵묵히 지켜나간 삶의 궤적이 유품과 기록들 속에 오롯이 펼쳐졌다. 그 중심에서 이순신의 사람됨을 간절히 노래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난중일기>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부터 전쟁이 막을 내린 1598년까지 이순신이 직접 쓴 나날의 기록이다. 친필본은 작성 연도에 따라 <계사일기> (1593), < 갑 오 일기>(1594), <정유일기>(1597)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일기를 묶어서 수록하고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이름을 붙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관람객이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의 한 구절을 읽고 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하루 앞두고 장수와 군관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연합뉴스]


일기를 쓰며 마음을 다스리다
이순신의 일기에는 수군 지휘관의 군무와 일상뿐만 아니라 장수로서의 고뇌와 울분, 백성들을 향한 애틋한 연민, 군사와 그 식솔들에 대한 책임감,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받드는 효심,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 등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다. 장군의 손때가 묻은 친필본에는 초서로 급하게 흘려 쓴 대목이 많은데, 전투와 대치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성실하게 기록을 남기며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난중일기>의 전투 기록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유형의 장수였는지 알 수 있다. 1592년 5월 29일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사천으로 돌격해 왜선 13척을 불태워 없애고 적군을 섬멸했다. 거북선이 처음으로 출전해 맹위를 떨친 사천해전이다. 이순신은 지략이 출중한 지장이자 실전에서는 저돌적인 맹장이었다.
“나는 여러 장수를 독려하며 명령해 한꺼번에 달려 들어갔다. 화살을 빗발치듯 쏘았다. 각종 총통을 바람과 천둥이 치듯 어지럽게 쏘았다. 적의 무리가 겁먹고 물러났다. 전(箭)에 맞은 놈이 몇백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왜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철환에 맞았다. 나도 왼쪽 어깨 위를 철환에 맞았다. 등으로 뚫고 나갔으나 중상까지는 아니었다.” (박종평 옮김, <난중일기> 1592년 5월 29일, 이하 같은 번역본 인용)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의 조총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하는 상처를 입었다. 어깨에 박힌 철환도 있었던 모양이다. “두어 치나 박힌 총알을 칼로 끄집어냈다.”(류성룡, <징비록>) 일기에 쓴 것과 달리 꽤 중한 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고 곧장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로 나아가 잇달아 승전했다. 연승의 이면에는 고뇌와 불안에 흔들리며 자신과 싸운 시간이 있었다.
“이날 저녁, 배에 바다 달빛이 가득 찼다. 홀로 앉아 이리저리 뒤척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쳤다. 자려고 해도 잠들 수 없었다. 닭이 울 때야 풋잠이 들었다.”(1593년 5월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내내 홀로 빈 정자에 앉아 있었다. 온갖 생각이 가슴을 쳤다. 가슴에 품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하랴. 어찌 다 말하랴. 정신이 아주 아득해 술에 취한 듯, 꿈속인 듯했다.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했다.”(1594년 5월 9일)
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용감무쌍한 강골이 아니었다. 불리한 여건에도 고단하게 분투하느라 지쳐갔다. 고뇌와 불안은 삶의 일부였다. 마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무너졌다. 하지만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휘청거리는 걸음을 다잡고 고난의 길을 헤쳐 나갔다. 자신과 싸우며 묵묵히 나아갔다. 여느 인생과 다르지 않다.

난중일기 친필본. 이순신 장군은 전투와 대치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성실하게 나날의 기록을 남겼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백성이 살아야 나라도 산다
이순신은 먹고사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임진왜란은 1년간 밀고 밀리는 공방전 끝에 1593년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협상에 들어가며 소강 국면으로 넘어갔다. 전투는 잦아들었지만, 조선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기근이 덮쳐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민생이 극도로 위태로웠다. 이순신은 백성과 같은 마음으로 농사 걱정을 했다. 단비가 내리면 “농민의 바람을 가득 채워줬다”며 함께 기뻐했다.
“더위와 가뭄이 아주 심하다. 바다 섬도 찌기는 마찬가지였다. 농사가 아주 걱정되는구나.”(1594년  6월 14일)
“이날 밤, 소나기가 마음에 흡족하게 내렸다. 이 어찌 하느님께서 백성을 보살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1594년 6월 15일)
전란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백성들도 걱정이었다. 1593년 초에 이순신이 지키던 전라좌수영 부근에도 영남에서 흘러든 피란민이 200여 호에 이르렀다. 임시로 머물게 해 간신히 겨울을 났지만, 봄이 오자 구휼할 물자가 없어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겼다. 이순신은 피란민이 농사지을 땅을 알아보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거주를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나라의 목장이 있는 곳이라 담당 관서에서 반대했지만, 끝내 허락을 받아냈다.
“돌산도는 지형상 적들이 침입할 수 없고, 땅도 넓고 비옥합니다. 사람부터 살리는 게 급하기에 백성들이 들어가서 살게 했습니다. 방금 봄갈이도 마쳤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전쟁에 쓸 말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반대합니다. (중략) 말을 키우는 한편 농사도 짓게 하면 나라와 백성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됩니다. 부디 이 가련한 백성들이 돌산도에 정착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임진장초> 1593년 1월 26일)
이순신은 돌산도에 이어 남해안의 여러 섬 목장과 무인도에 피란민이 거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백성들의 생계뿐만 아니라 조선 수군의 보급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피란민들이 농사지은 곡식이 군량미로 쓰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군량미 사정은 최악이었다. 나라에서 대주는 건 난망한 실정이었다. 군영에서 백성들과 힘을 모아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장수는 지휘관이자 경영자였다.
이순신의 경영 능력은 발군이었다. 백성들을 살려서 군량미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통념에 구애받지 않는 ‘경제 용병술’을 선보였다. 군사들 가운데 늙고 병들어 싸우기 힘든 자들은 둔전(屯田, 군량을 자급하는 밭)으로 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사실 이런 군사들은 전투나 훈련에 짐만 된다. 농사 경험을 살려 군량미를 생산하는 게 백번 낫다. 일거양득이다. 각자 잘하는 것을 시켜야 나라에 보탬이 된다.

이순신 장군이 생전에 사용한 복숭아 모양의 잔. 국립중앙박물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에 전시되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수군, 청어를 말리고 소금을 굽다
젊고 힘 있는 군사들은 수군의 재원을 조달하는 데 앞장섰다. 바다를 주름잡는 수군답게 물고기를 잡고, 미역과 해태(김)도 따고, 소금도 구웠다. 남해에서 나는 좋은 흙으로 질그릇을 빚어내기도 했다. 이순신은 그것들을 내다 팔도록 하여 군량미를 비축하고, 배와 무기의 재료를 구했다.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 7000여 두름(級)을 실어 왔기에, 김희방의 곡식 판매 배에 계산해 주었다.”(1595년 12월 4일)
“김종려를 소음도 등 13개 섬의 염전 감독관으로 임시 임명했다. ”(1597년 10월 20일)
이 사람들은 대부분 이순신 휘하의 군관들이었다. 군인이 청어 잡는 어부가 되었다가, 소금 굽는 염간이 되었다가, 질그릇 빚는 도공이 되었다. 이순신은 군량미, 배, 무기 등의 재원 조달에 열과 성을 다했다.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한 자들은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가 반드시 포상했다.
청어는 조선시대에 연근해에서 많이 잡힌 물고기 중 하나였다. 값은 싼데 맛이 좋아 가난한 선비들이 즐겨 사 먹었다고 한다.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라고 해 ‘비유어(肥儒魚)’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름(級)은 물고기를 20마리씩 묶어놓은 것의 단위다. 황득중과 오수가 7000여 두름을 실어 왔으니 대략 14만 마리쯤 잡은 셈이다.
청어가 정말 그렇게 많이 잡혔을까?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정월이 되면 청어가 알을 낳기 위해 해안을 따라 회유하는데, 수억 마리가 대열을 이뤄 바다를 덮는다”라고 했으니 14만 마리도 턱없이 많은 숫자는 아니다. <난중일기>에는 당시 수군의 일일 어획량이 최소 7200마리에서 최대 5만6000마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순신은 청어를 말리게 해 일부는 양질의 단백질을 제공하는 군사 식량으로 쓰고, 일부는 명나라에서 들여온 곡식이나 무기 재료와 바꿨다. 청어를 말릴 때 지푸라기로 눈을 꿰어서 엮었다고 해 ‘관목어(貫目漁)’라고 불렀다. ‘과메기’의 어원이다. 일기에서 청어를 실어와 곡식 판매 배에 계산해 줬다는 말은 명나라 곡식의 값을 치렀다는 뜻일 것이다.
소금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난중일기>를 보면 쇠 가마솥에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구웠다. 이순신은 남해안 곳곳에 염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감독관을 임명해 여러 섬을 돌며 소금 생산을 독려했다. 소금은 청어와 마찬가지로 군사들을 먹이거나 곡식으로 바꿨다. 전란 중에 귀하게 취급되어 비싼 값이 매겨졌다.
이순신은 먹고사는 문제에 진심이었다. 양반들이 꺼리던 생산과 교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고, 조선 수군의 공급망을 안정시켰다. 전란 중에 먹고사는 일은 전투 못지않게 치열했다. 잘 먹고 힘을 내야 이긴다. 그것이 바다의 왜적을 무찌르고 전쟁의 판도를 뒤집는 발판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탄신 480주년인 지난해 4월 2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연합뉴스]


어머니와 막내아들의 죽음
인간 이순신의 정신적 지주는 어머니였다.
“어머님과 떨어져 남쪽에서 두 번이나 설을 쇠니 가슴에 맺힌 큰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다.”(1592년  1월 1일)
<난중일기>는 임진년 새해를 맞아 어머니와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첫 장을 연다. 이순신은 일기에서 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지칭했다. <시경> ‘백주(柏舟)’ 편에 나오는 표현으로 ‘하늘’이라는 뜻이다. 그는 어머니를 정말 하늘처럼 받들었다. 그 정성 어린 마음이 일기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십여 가닥을 뽑았다. 희어지는 것을 어찌 꺼릴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593년 6월 12일)
“어머님을 모시고 같이 한 살을 더했다. 전쟁 중이라도 행복한 일이다.”(1594년 1월 1일)
이순신은 연로한 어머니를 여수에 모셔두고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종종 문안을 드렸다. 편찮으시다는 기별을 받으면 배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1594년 정월에는 깊은 잠에 빠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해가 서산에 이른 듯하다”며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하룻밤을 묵고 떠나는 아들을 이렇게 격려했다.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大雪國辱).”(1594년 1월 12일)
어머니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됐다는 소식을 듣자 어머니는 분연히 길을 나섰다. 여든셋의 나이로 병든 몸을 이끌고 아들을 만나기 위해 뱃길에 오른 것이다. 사람들이 극구 말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관을 짜서 배에 실으라며 굳센 의지를 보였다. 죽는 한이 있어도 아들을 살리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결국 그녀는 4월 11일 태안 앞바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4월 1일 백의종군을 명받고 감옥 문을 나선 이순신은 아산 집에서 어머니를 맞으려다 참담한 부고를 받았다. 부랴부랴 어머니의 시신을 운구하여 빈소를 마련했지만, 백의종군 신분이라 장례도 다 치르지 못하고 남쪽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겨야 했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신위 앞에서 목 놓아 소리치며 울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세상천지에 어찌 나 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랴. 일찌감치 죽느니만 못하구나.”(1597년 4월 19일)
지극한 슬픔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해 10월 14일 저녁에 이순신은 집안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봉투를 뜯지도 않았는데 뼈와 살이 먼저 떨렸다. 편지를 꺼내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둘째 아들 열의 글씨였다. 편지에는 비보가 담겨 있었다. 막내아들 면이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다. 이순신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았다. 소리 높여 슬피 울부짖었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가 아니냐. 그런데도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치가 어찌 이렇게 어긋날 수 있느냐? 불쌍한 내 어린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받아야 할 하늘의 재앙이 네 몸에 닿은 것이냐? 내 마음은 죽고 껍질만 남았구나.”(1597년 10월 14일)
이순신은 면을 따라 죽고 싶다고 할 만큼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부하들 앞에서는 마음껏 울부짖을 수 없었기에 소금 굽는 강막지의 집에 가서 큰 소리로 통곡했다. 빼어난 자질을 가졌지만, 스무 살에 요절한 막내아들을 서럽게 애도했다.

이순신 장군은 연로한 어머니를 여수에 머물게 하고 바쁜 와중에도 효성을 다했다. 아산 현충사 기록화. [사진 권경률]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돌이켜보면 1597년 정유년은 연초부터 이순신의 삶에 죽음이 짙게 드리운 해였다. 강화협상이 결렬된 후 왜적이 다시 쳐들어왔는데, 그는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로 도성에 잡혀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왕은 화가 나 있고 조정의 공론은 엄중해 죽음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평온하게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명에 달렸다. 죽게 되면 마땅히 죽을 뿐이다. ”(이분, <이충무공행록>)
4월에는 백의종군 길에 하늘처럼 받들던 어머니를 잃었고, 7월에는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수군 동료와 부하들이 칠천량에서 산화했다. 이순신의 마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해 9월 명량에서 13척의 판옥선으로 수백 척을 대적할 때, 그는 삶에 짙게 드리운 애통한 죽음들을 결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명의 사내가 좁은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의 사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1597년 9월 15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해 <난중일기>를 관통하는 이순신의 사생관(死生觀)이다. 그것은 울음소리였다. 죽은 자의 울음소리, 산 자의 울음소리, 가족의 울음소리, 백성의 울음소리가 울돌목에서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왜적을 멸했다.
<난중일기>에는 ‘칼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이순신의 칼은 왜적을 베는 칼이었지만, 본질은 사람을 지키는 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한 인간애였다.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가요로 읽는 한국사>(2025, 문화체육관광부 ‘세종도서’ 교양 부문 선정), <모함의 나라>(2022),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202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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